[밥&법] 곡소리 나는 체불임금 돌려받기
실업급여 받게 해줄테니
퇴직금 퉁치자는 사장 유혹 거부
노동청 진정이 다인줄 알았는데
그건 기나긴 싸움의 출발점일 뿐
노동청 시정지시해도 안먹히고
민사소송 걸어 가압류 하려해도
사장이 회사재산 빼돌리면 ‘허사’
형사처벌해봤자 벌금형 등 ‘뿅망치’
근로감독관은 “난 네편 아니다”
노동자들, 임금 받으려다 진 빠져
작년 체불임금 1조4286억
일본의 10배 해당하는 규모
국가가 나서 제 역할 해야할 때
그만두기 1년 전부터 월급이 제때 나온 적이 없었어요. 4년 넘게 다녔는데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지난해 8월에 그만두겠다고 했죠. 그런데 사장님이 “권고사직으로 처리해 실업급여 받을 수 있게 해줄 테니 퇴직금은 그걸로 퉁치자”고 하는 거예요. “어차피 받아야 할 돈 나랏돈 이용해보자”면서. 그런데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어서 실업급여 안 받겠다고 했는데, 월급 두달치랑 퇴직금 합쳐서 1167만원을 10개월이 넘도록 못 받고 있어요.
사실 제가 겁도 많고, 어디 가서 얘기 잘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회사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저도 아니까 좀 늦게 주는 것은 이해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퇴사한 지 두달 동안 5번이나 차일피일 미루면서 돈을 안 주는 거예요. 이해해주는 사람을 호구로 아는 거죠.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노동부 진정을 넣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할 수 없다. 진정 넣어. 나도 더이상 할 말 없어”라는 거예요. 노동청에 진정 넣고, 근로감독관이 적당한 수준에서 합의보라고 하기에 전 싫다고 했어요. 처벌하길 원한다고 했는데, 2월 중순에 검찰로 송치됐다는 얘기까지만 들었어요. 벌금 몇 푼 내고 끝날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나요. 진정 내면 끝인 줄 알았더니, 민사소송을 또 내야 하더라고요. 진짜 처음 들어보는 서류들 다 떼서 냈는데, 막상 가압류를 걸어보니 회사에 돈이 하나도 없어요. 돈을 미리 빼돌린 거 같더라고요. 그 사장님은 다니던 회사 과장 이름으로 회사 차려서 똑같은 일 하고 있어요. 해외여행도 가고 비싼 개도 키우고 좋은 차도 타고 다니는데, 제가 받을 돈은 없는 거예요.
기분이 어떠냐고요? 정말 스트레스 받고 좌절감이 들어요. 근로감독관이 처음엔 제 편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더라고요. 절차도 너무 복잡해서 누구한테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보기도 쪽팔리고. 한두 푼이면 그냥 더럽다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천만원이 넘는 돈을 안 받을 수는 없잖아요. 내 돈 떼먹은 사장은 정말 별일 없이 살고 있고 나만 똥줄 타고. 월급 받아 한달 한달 사는 것도 서러운데, 돈까지 떼이고 추심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맥 빠지고 허탈하죠. 나는 월급 받으려고 회사 다닌 거지 재능기부한 게 아닌데….
임금체불 피해 노동자 이혜경(가명·31)씨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정당한 임금을 못 받은 사람은 32만5430명으로 체불액은 1조4286억원에 이른다. 이는 한국보다 경제규모(국내총생산)가 3.2배인 일본(2014년 기준 131억여엔)의 10배고, 경제규모가 12배 큰 미국(지난해 기준 12억여달러)과 비슷한 수치다. 선진국보다 경제규모도 작으면서 임금체불 규모는 훨씬 큰 것이다. 한국의 경제규모를 반영하면 적절한 체불임금은 1500억~2000억원 수준이어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이종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객원연구위원) 체불임금을 10분의 1로 줄여야 ‘정상’이라는 말이다.
‘임금체불의 나라’ 한국은 노동자 임금이 체불되기는 쉽지만, 노동자가 체불임금을 돌려받기는 어렵다. 임금체불을 경험했던 노동자들은 “임금 떼인 것도 서러운데, 돈을 돌려받으려고 쫓아다니는 일은 더 서럽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떼인 돈을 못 돌려받다 보니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적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에 이르는 체불임금을 돌려받는 기간과 절차를 간소화하고, 국가가 적극 나서 합당한 구실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 노동청 갔다가…법원 갔다가 진 다 빠져요 흔히 임금체불이 발생했을 때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은 체불임금을 받기 위한 기나긴 여정의 시작, 차표를 끊는 수준에 그친다. 한 인터넷 언론사에서 한달 300만원을 받기로 하고 일했지만 여섯달 동안 임금을 한푼도 받지 못한 조현진(가명·34)씨는 고용노동청에 다녀와 오히려 “불안해졌다”고 했다. 조씨는 23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지난해 7월 고용노동청에 진정 내고 근로감독관을 만났는데, 처음으로 하는 말이 ‘나는 당신 편이 아니다’였다”며 “내가 당한 게 억울해 찾아갔는데도 도와줄 사람도 없고 불안한 마음이 컸다”고 했다.
진정을 넣는 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인 이유는 노동자들이 체불당했다는 증거를 일일이 찾아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료를 사업주가 갖고 있기 때문에 쉽게 대응하기도 어렵다. 조씨는 “사장이 나를 고용했다는 사실을 잡아뗐는데, 그걸 입증하기 위해선 회사 이메일 등이 필요했지만 사장과 관계가 안 좋은 상황에서 그런 걸 나 혼자 찾는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며 “사장이 증거를 인멸하려면 얼마든지 인멸할 수 있는 상황이라 고용노동청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해 아무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고용노동청 조사 결과, 조씨는 2150만원을 체불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고용노동청은 조씨의 사업주에게 체불임금을 지급하라는 시정지시를 했지만, 사업주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임금을 체불당한 노동자들의 역경 2라운드가 시작된다. 고용노동청에서 사업주가 시정지시를 받아들이거나, 사업주와 노동자 사이의 합의로 사건이 종결되고 임금체불이 해결되는 사례를 ‘지도해결’이라고 한다. 지난해 체불액 1조4286억원 가운데 지도해결된 체불액은 6866억원으로 전체의 48%에 불과하다. 노동자 수 기준으로는 32만5430명 중 19만8392명으로 61% 수준이다.
임금체불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경우 형사처벌할 수 없다.(반의사불벌) 즉 진정·수사 과정에서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체불임금을 지급할 경우 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지도해결률이 낮은 이유는 사업주가 지급능력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처벌 수위가 낮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훨씬 우세하다. 근로기준법의 임금체불 법정형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그러나 지난해 수사 과정에서 구속된 사업주는 단 21명이었다. 대법원 자료를 보면, 2015년 임금체불을 포함한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에서 정식재판을 받은 5482명 가운데 1심에서 실형을 받은 사람은 7%에 불과했고 집행유예가 14.8%, 벌금형을 받은 사람이 38.4%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노동청 수사 과정에서 체불임금 2150만원이 확인된 조씨의 사업주의 경우 검찰은 조씨를 벌금 200만원에 약식기소하는 데 그쳤다. 결국 지난해 기준 고용노동청에서 체불임금을 해결하지 못한 39%, 12만7038명은 고용노동부가 발급하는 ‘체불임금 등 사업주 확인서’를 들고 법원을 찾거나, 체불임금 받기를 포기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법원의 민사소송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사업주를 상대로 가압류를 걸기도 한다. 하지만 또다른 문제, 역경 3라운드가 시작된다. 가압류는 임금을 체불한 법인을 상대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법인에 재산이 없으면 가압류를 걸어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돌려받을 돈이 없기 때문이다. 펼침막 제작업체에서 일하다 임금과 퇴직금 1167만원을 체불당한 이혜경(가명·31)씨는 다니던 회사에 가압류를 걸었으나 법인 재산은 30만원뿐이었다. 이씨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은 회사 과장 이름으로 또 다른 회사를 차려 사업을 하고 있다. 이씨 사건을 대리하고 있는 김승현 노무법인 시선 노무사는 “민사소송의 특성상 회사를 대상으로 추심은 가능해도 사업주에 대한 추심은 불가능한 상황을 악용한 것으로 임금체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케이스”라고 밝혔다. 김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장은 “형사상으로 임금 미지급에 대한 ‘실질적 사업주’에 대한 처벌은 가능하지만 민사상 책임이 실질적 사업주에게 부과되지 않는 것은 문제”라며 “실제로 돈을 지급할 의무가 있는 이에게 책임을 부과할 수 있는 입법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떼인 임금 받아 드리는’ 건 국가의 역할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걸고 체불임금 등 사업주 확인서를 받기까지 수개월, 확인서를 받은 뒤 법원에 소송을 걸어 판결을 받기까지 길게는 수년이 걸리기 때문에 피해는 온전히 노동자 몫이다. 퇴직 1년째 2150만원을 받지 못한 조씨는 카드를 돌려막으며 생활하고 있다. 조씨와 함께 체불당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포기했다고 한다. 조씨는 “직원 상대로 ‘삥 뜯는’ 것과 다름없는 사업주들은 다시는 사업하지 못하도록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8개월째 임금을 받지 못한 이씨도 “월급쟁이로 사는 것도 힘든 일인데, 못 받은 임금 받으러 여기저기 쫓아다녀야 한다는 것이 참 억울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라며 “복지가 아무리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임금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의미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임금체불이 늘고 있는 미국의 경우, 임금체불을 막고 사업주를 제재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시행하고 있다. 2011년부터 뉴욕주에서 시행하고 있는 ‘임금절도예방법’(Wage Theft Prevention Act)은 뉴욕주 근로기준국장이 임금을 체불한 사업주에게 임금을 지급하라는 이행명령을 부과했는데도 체불임금을 지급하지 않을 경우, 사업주가 재산을 빼돌리는 것을 막기 위해 10일 안에 사업주 재산목록(은행계좌·부동산 등)을 공개하도록 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1만달러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또 임금체불을 방지하기 위해 채용된 날로부터 10영업일 안에 노동자에게 임금통지서를 주도록 하고 있는데, 통지서에는 사업주의 공식·비공식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기재하도록 하고 있다. 사업주가 잠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임금체불에 대응하는 가장 강력한 법은 지난해부터 시행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주의 ‘공정임금법’(A Fair Day’s Pay Act)이다. 법을 보면, 사업주가 체불임금 지급을 회피하려고 재산을 은닉하거나 위장폐업한 뒤 신규 창업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 노동부 근로기준집행국장이 사업주의 은행계좌 압류와 유치권 설정, 사업중단 명령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만약 임금체불을 한 사업주가 계속 사업을 하고 싶어하면 일정 금액의 보증채권을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위장폐업을 한 뒤에도 사업을 계속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사업을 이어받은 사람에게도 임금체불 사용자와 동일한 조처를 할 의무도 부과했다. 한국처럼 멀쩡히 다른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데도 해당 업체가 폐업해 체불임금을 못 받는 노동자가 속출하거나, 개별적인 압류절차를 밟기 위해 노동자들이 직접 법원을 찾아야 하는 불편이 최소한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없는 셈이다. 캘리포니아에는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주는 영세한 의류공장이 밀집해 있는데, ‘법은 지키는 사람만 손해’라는 인식이 팽배한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도 임금을 떼인 노동자들이 임금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국가 역할이 전면적으로 재검토돼야 한다는 주장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고용노동부 주최로 열린 임금체불 개선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에서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는 국가가 ‘임금지급 보장기구’(가칭)를 설치해 체불임금을 국가가 대신 변제하고 사업주에게 구상권을 청구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현재 사업주가 도산한 경우 퇴직금과 임금 일부를 국가가 ‘임금채권보장기금’에서 ‘체당금’으로 대신 지급하고 사업주에게 받아내는 체계가 이미 마련돼 있지만, 이를 전체 임금체불로 확대·개편하자는 취지다. 이 교수는 “노동자의 소송 부담을 줄여주고, 근로감독관의 행정 부담도 줄여줘 임금체불 규모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종수 연구위원도 지난달 발표한 ‘임금체불 해소와 권리구제를 위한 정책과제’에서 체당금 제도를 도산하지 않은 기업에도 확대하자는 주장을 내놨다. 여기에 필요한 돈은 임금채권보장기금의 사업주 부담률을 현재 0.06%에서 0.12%로 높여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이 연구위원은 사업주와 노동자가 공모해 체당금을 부정수급하는 등 ‘도덕적 해이’ 예방을 위해 “임금체불 사업주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근로감독 강화, 체불사업주 사전 가압류 조처 등을 병행해야 한다”며 “사업주로서 임금체불에 따른 비용을 크게 만들어 체당금 부정수급에 협조하기 어렵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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