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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06 20:09 수정 : 2017.02.08 10:28

기본소득 도입을 당론으로 채택한 녹색당은 지난해 20대 총선에서 청소년과 청년, 농어민, 장애인, 노인 등에게 월 40만원씩 기본소득 지급을 공약했다. 사진은 녹색당이 기본소득 통장 샘플을 만들어 홍보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모습. 녹색당 제공.

[밥&법] 대선정국 핫한 신상품 ‘기본소득’
스위스·핀란드 등 실험 잇따라
“노예상태 벗어나 다시 시민으로”
국내 정치권도 뜨거운 도입논쟁
완전 기본소득
노동 않고도 자유로운 생활토록
온국민에 조건 없이 현금지급
재분배 효과 크지만 엄청난 예산
부분 기본소득
충분치 않으나 생계자금 일부 지급
알래스카·나미비아서 실험단계
한국 월 30만원이면 180조원 소요
대선주자들 공약은
청년실업자·노인 등에 일정액 지급
기본소득 아닌 사회수당

기본소득 도입을 당론으로 채택한 녹색당은 지난해 20대 총선에서 청소년과 청년, 농어민, 장애인, 노인 등에게 월 40만원씩 기본소득 지급을 공약했다. 사진은 녹색당이 기본소득 통장 샘플을 만들어 홍보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모습. 녹색당 제공.
“나에게 기본소득은 ‘노예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다시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참가자 유하 예르비넨, 영국 <비비시>)

지난달 핀란드가 ‘기본소득’을 시행한다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전해졌다. 25~58살의 실업자 2000명을 대상으로 2년간 매달 560유로(약 70만원)를 지급한다. ‘실험’ 수준의 소규모지만, 중앙정부 차원에서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세계에서 처음이다. 이전에 이뤄진 기본소득 시도들은 모두 지방정부나 특정 기관이 주체였다. 지난해 6월에는 비록 부결되긴 했지만 스위스가 전국민에게 기본소득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의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먼 나라 이야기만 같던 기본소득 논의가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급부상하고 있다. 일부 대선주자가 대선공약으로 내걸면서 공론장으로 본격 들어온 것이다. 지난해 총선 때만 해도 원외정당인 녹색당과 노동당만 기본소득 공약을 내걸었던 것에 견줘보면, 불과 1년도 안 돼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인 이재명 성남시장과 김부겸 의원, 정의당 대선주자인 심상정 대표가 기본소득 도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정치권에서 일종의 가장 핫한 ‘신상품’으로 떠오른 모양새다. 학계에서도 몇년 전까지는 극히 일부에서만 논의되던 ‘비주류’ 담론이었지만, 최근에는 많은 학자들이 연구와 논쟁에 뛰어들면서 논의가 점점 활기를 띠고 있다. 기획재정, 보건복지부 등 정부 부처도 내부 스터디를 벌이고 있다.

기본소득 자체가 세계적으로 실험 단계에 있는 정책인 까닭에,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논자들에 따라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 정책 취지, 지급액 규모, 지급 대상, 재원조달 방안, 기존 복지제도와의 통합 여부 등에 따라 구체적인 제도 설계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국내 대선주자들의 기본소득 공약은 원칙적인 의미의 기본소득이라기보다는 사회수당 확대에 가까워 ‘무늬만 기본소득’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기본소득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는 해석도 함께 나온다.

2013년 10월4일 스위스 베른의 연방의회 앞에서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스위스 인구 800만명을 상징하는 5상팀짜리 동전 800만개를 동원했다. EPA 연합뉴스
■ 기본소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완전 기본소득’ 기본소득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모든 국민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일정한 소득(현금)을 보장해주는 것을 말한다. 근로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따지고, 재산이나 소득 등을 심사해 일정한 ‘자격’이 돼야 지급하는 기존 복지제도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좌파와 우파 양쪽에 찬성론자들이 다 있다. 좌파 기본소득론자들이 소득불평등과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충분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 방점을 둔다면, 우파 기본소득론자들은 기존의 복지제도를 기본소득으로 통폐합해 복지비용을 줄이고 노동시장을 더 유연하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최근에는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고용감소의 대안으로도 급부상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각 개인이 노동을 하지 않더라도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을 정도의 현금을 정기적으로 지급해주는 것이 목표다. 기본소득만으로 생활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도 있고, 본인이 원할 경우 시장경제 안에서 추가 노동을 해서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기본소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데, 이 정도 수준의 기본소득을 ‘완전 기본소득’이라고 한다. 완전 기본소득은 정부로부터 받는 돈이 생계를 충분히 꾸려갈 수 있는 수준, 최소한 최저생계비 이상이 돼야 하며, 이때 기초수급, 국민연금, 기초연금, 양육수당, 실업급여 등 기존 복지제도 중 현금성 복지는 대부분 기본소득으로 대체된다. 엄청난 규모의 재원이 필요하며 재분배 효과도 크다.

아직 완전 기본소득이 현실세계에서 실현된 적은 없다. 지난해 스위스에서 추진된 기본소득 운동이 그나마 완전 기본소득에 가깝다. 당시 발의된 국민투표 법안 내용은 헌법에 기본소득에 대한 권리를 명시하는 정도였지만, 스위스 기본소득 운동단체들은 구체적으로 “기본소득 정책이 시행된다면 성인 기준 월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원)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제안했었다. 이 수준도 스위스 소득 기준으로는 빈곤선을 겨우 넘기는 정도여서 아주 큰 액수는 아니다.

■ 현실에선 모두 ‘부분 기본소득’ 시도 미국 알래스카, 나미비아 등 현실에서 시행됐거나 추진된 기본소득은 거의 다 ‘부분 기본소득’이라고 봐야 한다. 생활하는 데 충분한 돈은 아니지만, 생계에 필요한 돈의 일부를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기존에 주던 복지급여 중 일부가 대체될 수 있다. 정원호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은 “재분배 효과가 작지만 비용이 적게 들고 완전 기본소득보다 유연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알래스카주는 1982년부터 주민들에게 ‘영구기금 배당’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소득을 주고 있다.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에서 나오는 수입의 25%로 기금을 조성해 주민들에게 나누어준다. 거주기간만 충족하면 누구나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지만, 액수는 가장 적었을 때가 1984년 연 331.29달러(35만원), 가장 많았을 때가 2015년 연 2072달러(237만원)에 그쳤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시민단체가 2008~2009년 특정 지역의 60살 이하 거주자 9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본소득 실험도 사정은 비슷했다. 당시엔 빈곤 개선을 위해 국제단체 후원으로 월 100나미비아달러(약 12미국달러)를 지급했는데 일을 하지 않고 생계를 보장하기엔 충분치 않았다.

완전 기본소득보다는 비용이 적게 든다고 하지만, 이 역시 만만찮은 규모의 돈이 필요하다. 정원호 연구위원과 강남훈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최근 발간한 ‘4차 산업혁명 시대 기본소득이 노동시장에 미치는 효과 연구’ 보고서를 통해 모든 국민에게 월 3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일종의 부분 기본소득으로 볼 수 있다. 월 30만원이 크지 않아 보이지만, 이를 전국민에게 지급하려면 연 180조원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나라 복지예산 전체(올해 기준 약 130조원)보다 큰 규모다. 보고서는 현재의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와 기초연금, 근로장려금(EITC)을 기본소득에 통합하는 방안을 설계했는데 여기서 13조원 정도가 절약된다. 또 별도로 시민세(세율 10%)와 환경세, 토지세 등을 새로 부과해 재원을 마련하자는 것인데, 전체 가구의 82%가 자신이 납부한 세금보다 기본소득 혜택이 더 클 것으로 추정했다. 녹색당이 주장하는 ‘전 국민 월 40만원 지급’, 노동당이 주장하는 ‘전 국민 월 30만원 지급’ 등도 모두 부분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 대선주자들 ‘기본소득’ 내걸었지만…아직 맹아적 단계 전통적인 복지제도는 일반적으로 공공부조(기초생활보장제도 등 빈곤층에게 지급하는 소득지원), 사회보험(건강보험·고용보험 등 본인이 보험료를 납입하고 필요시 혜택), 사회서비스(노인요양·보육서비스·교육 등), 사회수당(아동수당·청년수당·노인수당 등 정부가 특정 인구집단에 권리보장 차원에서 조건없이 지원) 등으로 나뉜다. 현재 국내 대선주자들이 내놓고 있는 기본소득 방안은 엄밀한 의미의 기본소득이라기보다는 기본소득과 사회수당의 중간, 또는 사회수당에 가깝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재명 성남시장(민주당 대선주자)은 0~29살, 65살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연 100만원의 ‘생애주기별 기본소득’을, 장애인 및 농민에게 연 100만원, 전국민 5천만명을 대상으로 연 30만원을 지역상품권으로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후자는 부분 기본소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전자는 특정 인구집단에만 지급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이라기보다 사회수당 성격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기존 복지는 그대로 놔둔다. 이 시장의 공약 실현을 위해선 연 43조원의 재원이 추가로 필요한데, 예산절감, 재벌 대기업·고소득자 중과세, 국토보유세 도입 등을 재원 확보 방안으로 제시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0~12살 아동과 19~24살 청년, 노인에게 월 3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대신 기존 양육수당(월 10만~20만원)이나 기초연금(월 20만원)을 통합하는 방안을 공약으로 검토 중이다. 연 41조원이 필요하다. 역시 사회수당에 가깝다.

김부겸 민주당 의원의 ‘청년 기본소득 공약’은 기본소득과 거리가 더 멀다. 김 의원이 최근 발표한 내용을 보면 19~29살 청년에게 매달 20만~30만원을 지급하되, 대상을 비정규직 취업자와 청년실업자로 제한했다. 특정 인구집단(청년층)으로 제한한 뒤에 경제활동 상태에 따라 한번 더 대상을 걸러내겠다는 방안이어서 기본소득으로 보기는 어렵다. 지난달 불출마 선언을 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내놓았던 ‘한국형 기본소득’ 공약도 청년 기본소득을 첫 직장 마련 때까지만 주기로 하는 등 각종 조건이 따라붙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인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 쪽은 기본소득 도입에는 유보적이면서도 “기본소득 도입론이 나오는 사회·경제적 배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금수당 확대 등 현실 조건에 맞는 최적의 방안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태수 꽃동네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장은 “‘신상품’에 대한 갈망이 큰 정치권에서, 대선주자를 중심으로 기본소득 담론이 급부상하고 있다”며 “진보개혁진영과 보수진영을 두루 포괄할 수 있을 만큼 정치적 흡인력이 큰데다 복지국가를 보완, 확장하기 위한 논의로도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치권에서 ‘기본소득’이라는 간판을 다소 성급하게 내걸었더라도 폭넓게 ‘부분 기본소득’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아동이나 청년, 노인 등 특정 인구집단에 기본소득을 먼저 도입하는 방안도 궁극적으로는 완전 기본소득을 지향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승윤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우리나라의 고용보험이나 국민연금도 점차적으로 전 인구집단에 확대하는 방식으로 제도가 완성돼왔기 때문에, 기본소득 역시 일부 집단에서 시작해 순차적으로 확대해나가면 된다”고 말했다. 이재명 시장의 공약 자문을 하고 있는 이한주 가천대 교수(경제학)는 “조세저항이 큰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을 일정 수준액 이상으로 지급하려면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고 기존 복지제도를 전면 재조정해야 한다”며 “현재 공약이 완전한 의미의 기본소득하고는 차이가 크지만 일단 낮은 수준이라도 시작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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