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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23 18:35 수정 : 2017.01.23 21:40

[밥&법]

일제때 강제 격리된채 단종·낙태
일 변호사, 인권침해 뒤늦게 안뒤
2004년 한국 변호사들과 함께 소송
500여명 일일이 진술서 받아
일본 정부 상대 피해배상 끌어내

해방 뒤에도 인권침해 이어졌지만
한국은 지원금 월15만원 ‘쥐꼬리’
결국 정부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변호인단 국경 초월 인권의식 커져
‘베트남전 학살’ 공익소송 고민도

14일 ‘한센인권활동 백서’ 발간에 맞춰 열린 ‘한센인의 인권과 과제’ 토론회에 참석한 도쿠다 야스유키(첫 줄 오른쪽에서 넷째) 변호사 등 일본 변호사와 박영립 변호사(첫 줄 왼쪽에서 둘째) 등 한국 변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센인권변호단 제공

도쿠다 야스유키(73) 변호사가 소록도를 처음 찾은 건 2003년 여름이었다. 1916년 일본이 조선의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격리하기 위해 병원(자혜병원, 현 국립 소록도 병원)을 세워 이들을 수용한 곳이 바로 소록도였다. 도쿠다 변호사는 소록도 주민들의 일본 정부에 대한 보상금 청구를 돕기 위해 소록도에 왔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지난 14일 도쿠다 변호사는 이곳을 다시 찾았다. 한센인들을 위한 한·일 변호사들의 연대 활동이 담긴 ‘한센인권활동 백서’ 발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도쿠다 변호사는 한센인권변호단을 이끌고 있는 박영립 변호사와 따뜻한 포옹을 나누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행사에는 도쿠다 변호사 외에도 오쓰키 노리코, 곤도 쓰요시, 시미즈 요시로, 아유쿄 마치코, 미나구치 마스미 등 6명의 일본 변호사가 함께했다. 박영립 단장과 장철우 부단장, 조영선, 이영기, 양정숙, 이정일, 서중희, 김준우 변호사 등 한센인권변호단 소속 변호사들이 이들을 반갑게 맞았다. 이들은 갓 인쇄된 백서를 들고 소록도 한센인들의 납골당인 ‘만령당’부터 찾았다. 어려서 강제로 고향과 가족을 떠나 소록도로 옮겨진 한센인들은 단종·낙태 수술로 후손을 대부분 보지 못했다. 돌아갈 곳도 돌볼 이도 없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이 바로 만령당이었다. “영령이시여. 지난 13년간 진행되던 일본 한센인 보상 청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단종·낙태 소송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차별과 편견 없는 평등한 세상에서 편안히 쉬소서.” 서중희 변호사의 고유문 낭독이 끝나자 한국과 일본 변호사들은 백서 옆에 국화꽃을 바쳤다.

이들의 인연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규슈 오이타현 벳푸시의 ‘동네 변호사’인 도쿠다씨는 1995년 한센병 요양소에 있던 작가 시마 히로시씨의 편지를 받았다. “(한센인을 강제격리하는) ‘나예방법’과 같은 악법을 존속시켜온 것에 대해 인권과 가장 깊은 관계가 있는 변호사회의 책임은 없는가.” 편지는 도쿠다 변호사에게 죽비를 내려치는 듯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를 속죄하려 도쿠다 변호사는 1998년 나예방법 위헌확인 및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구마모토지방재판소는 이를 받아들였다. 일본 정부는 소송 결과를 존중했고, 국회는 이듬해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의 지급 등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강제수용됐던 한센인들에게 보상을 시작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도쿠다 변호사는 또 다른 ‘죽비’를 마주하게 됐다. <조선한센병사>의 저자인 다키오 에이지씨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과 대만에서도 똑같이 한센인 강제수용 정책을 실시했는데, 왜 자민족 중심주의에 갇혀 일본의 피해만 주목하는가”라고 질타한 것이다. 도쿠다 변호사는 곧바로 소록도를 찾았다. 그는 일본에서 소송을 진행했을 때와 달리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가 태평양전쟁 때 참전했다 돌아가셔서 오랫동안 나는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던 가해자기도 했다. 소록도에서 일본이 저지른 잔혹함에 마음이 아팠고 일본인이라는 게 부끄러웠다. 그런데 가해자인 내가 가해자인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하자고 하면 받아줄지 마음에 걸렸다.” 도쿠다 변호사가 그로부터 14년 뒤 털어놓은 고백이다.

소록도 주민들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대리하기로 결심한 도쿠다 변호사 등 일본 변호사들은 2004년 한국 변호사들의 도움을 구하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광주·전남지부와 대한변호사협회(대한변협)의 문을 두드렸다. “일본인인 내가 한국의 국내 문제에 개입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당시 대한변협 인권위원장이었던 박영립 변호사는 “대한변협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법률 활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동안 몰랐던 한센인들의 인권침해를 일본 변호사들로부터 전해 들은 게 민망하고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문둥이’라는 편견이 낳은 한센인에 대한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게 해준 것도 일본 변호사들이었다. 당시 민변 광주·전남지부장이었던 민경한 변호사는 “젊은 일본 변호사가 한센인들에게 밥을 떠먹여주고 남는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진한 감동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한국 변호사들의 부끄러움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박 변호사는 같은 해 7월 뜻을 함께하는 변호사들과 함께 ‘한센병 소록도 보상청구 소송 한국 변호단’을 꾸렸고, 일본 후생노동성이 한국 한센인들의 보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일본 변호사들과 함께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도쿄지방재판소는 2005년 10월25일 취소소송을 기각했지만, 한·일 변호사와 한센인들의 노력 끝에 일본은 법을 개정해 일제강점기 강제격리됐던 한국과 대만 한센인까지 보상 대상에 포함했다. 법원 판결에 좌절하지 않고 한·일 변호사와 시민들이 국회를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법 개정이 끝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보상을 받으려면 일제강점기 소록도 등에 강제격리됐다는 ‘증거’가 있어야 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며 제대로 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한·일 변호사들은 전국에 흩어진 한센인들을 만나 진술서를 받기 시작했다. 이 진술서를 바탕으로 일본 후생노동성은 2006년 3월27일부터 지난해 5월12일까지 한국 한센인 590명에게 1인당 800만엔(약 1억원)씩 보상했다. 후생노동성과 협상을 맡았던 아유쿄 마치코 변호사는 “강제수용소를 만든 일본에서 온 변호사만 있었다면 믿어주지 않았을 텐데 한국 변호사들의 덕분에 한센인들이 안심하고 맡겨줘서 감사하다”며 그간의 공을 돌렸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은 한센인 외에도 위안부·강제동원·원자폭탄 피해자 등이 있었지만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은 것은 한센인과 원폭 피해자뿐이다. 장완익 변호사는 “일본인 피해자가 인정되면 한국 피해자를 인정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일본 정부의 입장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면서도 “그래도 한센인 소송은 이긴 싸움이라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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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을 기준으로 보면 이들은 한국인, 일본인으로 나뉘지만 한센인 인권의 관점에서는 모두 한편이었다. 양심적인 한·일 시민들의 연대는 한·일 과거사 문제의 해결책이기도 하다. 시미즈 요시로 변호사는 “지금 일본 정부가 가해자이면서도 부산 소녀상을 문제 삼으며 한국을 괴롭히는 게 화가 난다”며 “한센인 싸움은 국가와 국가를 넘어 시민과 시민이 만나 한·일 문제를 해결해가는 선례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도쿠다 변호사는 ‘한국 한센인 일본 소송’의 목적으로 4가지를 꼽았다. 일본의 사죄와 배상, 일제강점기의 한센인 인권침해 진상규명, 한국에서 한센인들의 인권회복, 한국·일본·대만 한센인들의 연대. 일본 정부의 보상이 시작된 뒤 3가지는 실현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계속된 한센인들의 인권침해를 회복하는 것은 한국의 몫이었다. 2006년 10월 한국 변호사들은 기존의 모임을 ‘한센인권변호단’으로 재정비하고, 후속 작업을 시작했다. 진상규명과 보상방안을 논의하는 사이, 2007년 국회에서 ‘한센인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돼 2009~2013년 ‘한센 피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했다. 그러나 한국의 보상법은 일본, 대만과 달리 국가의 사죄와 책임이 빠졌다. 2012년부터 지급된 보상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와 차상위계층 한센인에게 월 15만원만 지급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3월 돼서야 모든 피해자에게 보상금이 지급되도록 개정된 법이 시행됐다. 그러나 고령인 한센인들에게 월 15만원이란 보상금은 실질적인 피해 보상도 되지 못하고 일본의 보상금 1억원보다 크게 부족하다. 결국 한국의 미흡한 보상 탓에 한센인권변호인단은 2011년부터 6차례에 걸쳐 한센인 539명의 강제 단종·낙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제 한국 변호사들은 일본 변호사들에게서 받은 것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려 하고 있다. 초기 한센인 소송 과정에서 한국 변호사들의 교통비, 식비, 숙박비 등 실비를 댄 것은 일본의 공익기금이었다. 한국 변호사들도 한센인 소송 과정에서 모은 기금을 바탕으로 공익소송을 지원하는 사단법인을 꾸릴 생각이다. 인권 문제에 있어 일본 변호사들이 일본을 넘어섰듯 한국 변호사들도 한국을 넘어서고자 한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고민하는 조영선 변호사는 “일본 변호사들의 고민이 우리나라로 넘어오고, 우리의 고민은 이제 한국군의 피해를 받은 베트남을 향하고 있다. 한센인 활동에서 배운 인권에 대한 고민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13년이 지나도 도쿠다 변호사의 마음엔 소록도가 있었다. 이날 행사가 끝나고 밤 10시17분께 도쿠다 변호사는 오쓰키 변호사와 함께 불 꺼진 국립 소록도 병원을 찾았다. 두 사람이 온 걸 아는지 잠에서 깬 할머니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이어갔다. 오쓰키 변호사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의 손 없는 손을 잡고 “건강하세요”라고 말하는 사이 도쿠다 변호사는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송옥남 할머니는 두 사람이 잊을 수 없는 한국 한센인 일본 보상청구소송의 ‘1번’ 원고였다.

소록도/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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