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1.09 20:32
수정 : 2017.01.09 22:47
[밥&법] 동네 변호사가 간다
나의 의뢰인 ㅂ씨는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아이들 키우기가 만만치 않았다. 본인도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동네에서 계를 만들어 계주를 하고 있었다. 장사가 잘 안돼서 계원들이 낸 돈을 조금씩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서 갚아야지’라고 초초하게 생각할 때쯤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돈을 빌려준다는 내용이었다. 전화상담원은 ㅂ씨에게 “이미 여러 대출기관에 빌린 돈이 많아 신용등급이 낮아서 돈을 더 빌려줄 수는 없다. 하지만 방법이 있다”며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ㅂ씨는 결국 그에게서 생활비를 여러 차례 빌렸다.
곧 이자가 이자를 낳아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도저히 갚을 수 없었다. 그에게 고소를 당한 뒤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이 전문사채업자였음을 깨달았다. 구치소에서 구금된 상태에서 만난 ㅂ씨는 “이미 이자만 해도 원금보다 많이 갚았다”며 눈물을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성인인 자신의 법률적 의사로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 고리의 이자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다. 결국 ㅂ씨의 남편이 집을 팔아 합의해 줬다. 그 뒤 부부의 관계는 위기에 처했다.
또다른 의뢰인 ㅎ씨는 젊은 직장인이다. ㅎ씨는 신용카드 대금이 조금씩 밀리자 리볼빙 서비스로 대출기한을 늘렸다. 마치 자신이 쓸 수 있는 신용카드 한도가 늘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직장생활 수년 만에 결국 여러 카드회사의 리볼빙 서비스로 돌려막기를 하다 감당 못할 지경에 처했다.
ㅎ씨는 인터넷 카페에서 “신용등급에 상관없이 돈을 빌려준다”는 글을 보고 연락했다. 상담원은 월세로 살고 있던 ㅎ씨에게 마치 전세보증금이 있는 것처럼 계약서를 만든 뒤에 제2금융권에 같이 가서 돈을 대출받자고 했다. 대출업자는 주도적으로 전세보증금 계약서를 만들고, 대출은행에 가서 돈을 빌렸다. ㅎ씨는 업자를 따라다니며 소극적으로 “네, 네”라고 답변만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거웠다. ㅎ씨는 ‘사문서 위조 및 행사’에 ‘대출기관에 대한 사기죄’라는 중범죄의 주범으로 처벌을 받게 됐다. 신용불량을 피해 보고자 했던 ㅎ씨는 더 큰 곤경에 처했다. ㅎ씨와 대출은행 간의 채권채무 관계만 남았고 개입한 공범 대출업자들은 잡지 못했다.
주변에서 돈 떼였다는 말을 들으면 흔히들 고소하라고 한다. 채무자가 돈을 못 갚고, 일정 요건이 되면 사기죄가 성립한다. 갚지 못한 금액이 5000만원을 넘으면 실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다. 형사고소는 채무자에게 강한 심리적 압박을 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돈이 없어 돈을 빌렸다가, 그 돈을 갚지 못하면 사기죄로 처벌된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타당한 일일까?
대출업자들은 달콤한 말로 돈 빌려가라며 유혹한 뒤에, 무거운 이자를 받아내고, 돈을 갚으라며 법의 힘을 빌려 압박한다. 이들은 마치 먹을 것이 있으면 맹렬히 먹어치우고 황량한 폐허만 남기는 메뚜기 떼와 다를 것이 없다.
합법적인 ‘메뚜기 떼’가 와서 먹어치운 뒤에는 ‘불한당’이 덮친다. 채권자가 돈 빌려갈 사람을 찾아 나서고 대출을 받으라고 광고하고 전화까지 하는 시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빌려준다. 심지어는 신용등급이 안 되어 더 이상 빚을 내지 못하면 다른 방법(?)을 적극적으로 알려주는 범죄집단까지 등장했다.
이론상 차용금 사기란 변제 의사나 변제 능력이 없으면서도 돈을 갚을 것처럼 채권자를 기망하여 돈을 빌리는 행위를 말한다. 변제 의사가 없는 경우란 사업을 하지 않는데도 사업을 한다고 속여서 돈을 빌려가는 행위 같은 것을 말한다. ㅂ씨나 ㅎ씨는 변제 능력이 없으면서도 대출기관을 속여서 돈을 빌렸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채권자는 속았는가? ‘채권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 민사 채권법의 기본정신이다. 지금 채권자들은 변제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가라 하고는, 갚지 못하면 민사 강제집행에 그치지 않고 형사처벌까지 한다.
‘빚 권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채권법의 역할은 무엇일까. 형사법상의 ‘변제 능력’이란 민사법의 ‘채무 불능’과 질적으로 다른 개념으로 재구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조수진/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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