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7.05 11:40
수정 : 2016.07.18 21:41
[밥&법]
서울 서촌 쌀집 주인 최한진씨
과거 두차례 이전땐 못받았지만
이번엔 법 개정안 덕에 받게 돼
용산참사 계기 ‘권리금 보호’ 규정
임대인이 방해땐 손배 책임 물어
재건축·전통시장은 제외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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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종로구 내자동에 동신미곡상회를 운영하는 최한진(58)씨가 잡곡을 살펴보고 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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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이 바꾼 세상
“임대인은…권리금 계약에 따라 임차인이 주선한 신규차임인이 되려는 자로부터 권리금을 지급받는 것을 방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상가 권리금 회수 방해 금지
-상가건물임대차 보호법 10조4항(권리금 회수기회 보호 등)→신설 조항
-2015년 5월13일 시행
“아유 어딘지 알죠.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지난달 28일 오후 1시 종로구 내자동 동신미곡상회 ‘사장님’ 최한진(58)씨가 경쾌한 목소리로 단골손님의 전화를 받았다. 오토바이에 묵직한 쌀 두 포대를 싣는 최씨의 표정은 가벼웠다. 최씨는 지난밤 모처럼 깊은 잠을 잤다고 한다. 지난해 8월 새 건물주로부터 “나가달라”는 통보를 받은 뒤 1년 가까이 속을 끓여오던 분쟁이 전날 법원 조정으로 잘 해결됐기 때문이다. 가게 한켠에 걸린 달력에 빼곡히 적혀있는 쌀 배달 날짜와 건물주와 면담, 소송 일정은 그의 지난 1년을 보여주고 있었다.
최씨 역시 요새 대부분의 ‘토박이 상인’들이 겪고있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밀려 지금의 가게를 옮겨야 한다. 10년째 쌀과 잡곡을 팔아온 4평(13.22㎡) 남짓한 지금의 가게가 있는 ‘서촌’이 갑자기 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단, 최씨는 대부분의 상인들이 권리금 한푼 못받고 쫓겨나는 경우와 달리 새로운 임차인에게 권리금을 받고 떠난다. 그동안 음지에 있던 ‘상가권리금’의 존재를 법조항에 명시한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지난해 5월 시행된 덕을 본 것이다. “법이 죽었다고 욕만 했는데, 법이 살아있는 것을 본거죠. 대한민국 보우하사 판사님, 변호사님들이 도와주니까 운좋게 해결됐다고 생각해요.”
최씨는 19살에 서촌에 둥지를 틀었다. “자수성가 하자”는 꿈 하나 갖고 인천 강화군에서 서울로 올라와 8년 동안 쌀가게 종업원으로 일하다 직접 가게를 차렸다. “옛날에는 쌀장사하면 안망한다고 했어요. 불교에서 남한테 곡식을 주는 사람은 후세에 부귀영화 누린다고 하더라고.” 그는 외상값 못받고 도망간 사람들한테도 ‘보시했다’고 생각하고 착실하게 일했다고 한다. 최씨는 “여기 살던 어르신들이 강남으로 이사 가서도 우리집 쌀을 찾는다”고 웃었다.
번듯한 쌀가게 ‘사장님’이지만 최씨는 임차인이다. 그동안 서촌에서 두번 가게를 옮겼다. 두번 다 권리금은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맨몸으로 나왔다. “건물주가 나가라고 하면 알아서 나가야 하는 줄 알았지. 나오면서 시멘트 깨진 게 있으면 바르고 문턱 만들었으면 다시 낮추고. 맨몸으로 나오면서 먼지 한톨 남기지 않고 나왔어요. 임차인은 그래야 하는 줄 알았어.“ 새 건물주의 대리인이 “가게를 비워달라”고 할 때 최씨는 또 다시 맨몸으로 짐을 싸야하나 싶었다. 이전 건물주와 최씨는 올해 6월까지 계약한 상태였지만, 새 건물주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임대차보호법상 5년이 지나면 계약 갱신 요구 권리를 보호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 3월 건물주는 점유이전금지가처분신청과 함께 명도소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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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상가임대차상담센터 월별 권리금 분쟁 상담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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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만큼은 빈손으로 안 나가고 싶었어요.” 더이상 임대 계약을 갱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최씨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새로운 임차인을 찾아 가게를 넘기고 권리금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 최씨의 눈에 들어온 것이 2015년 5월14일 시행된 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었다. 서울중앙지법은 명도소송을 조정하며 법 개정안을 적용했고, 최씨는 새로 들어올 프랜차이즈 카페 점주에게 권리금을 받고 가게를 넘기게 됐다.
법 개정안은 상가권리금이 발단이 됐던 2009년 용산참사 이후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진통끝에 국회를 통과했다. 법은 그동안 자영업자 사이에서 음성적으로 존재하던 권리금을 “유형·무형의 재산적 가치”라고 인정했다. 명확한 기준이 없는 권리금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지만, 거의 모든 상인들이 주고받는 현실을 본 것이다. 또 법은 “임대인은 임대차기간이 끝나기 3개월 전부터 임대차 종료 시까지 임차인이 섭외한 신규임차인으로 부터 권리금을 받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이를 막을 경우 건물주에게 손해배상 책임까지 부과했다.
실제로 법 개정 뒤 최씨 같이 법에 기대는 임차인들이 부쩍 늘었다. 서울시 상가임대차상담센터만 봐도 법 시행전(2015년 1~4월) 월평균 약 55건 접수되던 권리금 상담은 법시행 뒤(2015년 5~12월) 월평균 약 323건으로 6배가 증가했다. 임영희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맘상모) 사무국장은 “권리금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임차인이 임대인과 협상할 여지가 커졌다는 데 법 개정안의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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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종로구 내자동에 동신미곡상회를 운영하는 최한진(58)씨가 단골손님에게 걸려온 주문 전화를 받고 쌀 배달에 나서고 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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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씨는 ‘운이 좋은 경우’다. 개정 법률은 건물주가 재건축을 하거나, 전통시장인 경우 권리금 보호대상에서 제외한다. 최근 대부분 상업용 건물이 재건축을 통해 들어서는 만큼 법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조금만 주변 상권의 가치가 올라갈 경우 건물주가 보증금과 임대료를 두세배씩 올리는 현실에 상인들이 권리금을 받지 못하고 나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높은 보증금과 임대료 때문에 새로운 임차인을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 개정 논의에 참여했던 김영주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는 “최씨의 경우 법이 바뀌어서 권리금을 받고 나가신 것은 맞다”면서도 “지금의 서촌을 일군 가게들은 나가고, 상관없는 가게들이 들어오는 젠트리피케이션은 현행 법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 한계다”고 말했다. 현재 정치권과 정부에서도 임대차보호법 개정이나 ‘자율상권법’(19대 국회 새누리당 발의) 제정을 통해 과도한 임대료 상승을 막고, 계약 갱신요구권 기간을 5년에서 10년으로 늘리는 등의 대안들을 논의하고 있다.
고한솔 이승준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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