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7.11 18:35
수정 : 2016.07.11 18:43
100년, 너무 늦은 사과
|
일러스트 오금택
|
1906년 7월12일, 프랑스 최고재판소가 “드레퓌스는 무죄”라고 결론짓는다.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간첩 누명을 쓴 지 12년 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용감한 사람들이 나서주었다. 소설가 에밀 졸라는 논객으로 활약했고 조르주 피카르 소령은 군사재판이 엉터리였음을 폭로했다. 그래도 너무 때늦은 판결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반유대주의의 탓이 크다.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관학교 시절부터 괴롭히던 장교도 있었다. 간첩 누명을 썼을 때에는 언론이 나서 반유대주의를 선동했다. 그의 결백이 분명해진 다음에도 유대인은 간첩이라며 억지를 쓰는 사람이 많았다. (기자였던 테오도어 헤르츨은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을 취재하던 중 충격을 받아 과격한 유대인 민족주의자로 변신한다. 헤르츨의 주장은 훗날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진다.)
원래 군대처럼 몸집 큰 조직이 과거사를 바로잡는 일에 굼뜨기도 하다. 프랑스의 폴 고자크 대령은 “드레퓌스가 결백? 역사가의 이론일 뿐”이라는 글로 물의를 빚었다. 사건 당시의 일일까? 아니다. 100년이 지난 1994년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995년이 되어서야 프랑스 군은 공식적으로 자기네 잘못을 인정하지만, 이 역시 때는 늦은 것 같다.
글 김태권 만화가
|
<한겨레> 자료사진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