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2.24 17:14
수정 : 2017.02.24 20:32
허문영
영화평론가
30년 된 술집 ‘소설’이 2월27일을 끝으로 문을 닫는다. 1960년생인 주인 염기정은 1988년 말 이대 후문 쪽에 볼쇼이라는 이름의 술집을 처음 열었고, 7년 전 가회동 지금의 장소에 터를 잡았다. 이름과 장소는 몇 차례 바뀌었지만 주로 문화예술계와 언론계에 속한 단골들은 그녀가 마련한 작은 공간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나는 1991년에 처음 그곳에 발을 들였고, 마주치진 않았지만 말년이 외로웠던 선친도 종종 그곳에서 긴 밤을 보냈다. 나만큼 오래된 단골이지만 출입 횟수는 압도적으로 많았던 애주가 친구 임범은 주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소재로 <한겨레21>에 칼럼을 연재했고, 그 글들은 <내가 만난 술꾼들>이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약속을 잡지 않아도 그곳에 가면 낯익은 사람들을 만났고, 서로 지겨워하면서도 그래도 보는 편이 더 좋았던지 1차가 끝나면 발길은 어느새 소설 쪽으로 향했다. 소설을 주 무대로 찍은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2011)에서 유준상은 “소설이라는 곳에 갔다”는 내레이션을 반복하며 소설에 세 번 찾아간다. 술집이 등장할 법하지 않은 좁은 골목을 지나 희미한 불빛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에서 소설은 마치 유령의 집처럼 몽환적으로 묘사된다. 나도, 아마 많은 술꾼들도, 무언가에 홀리듯 그곳에 가고 또 갔다. 술 좋아하는 한 문학평론가는 언젠가 “소설은 쓰는 게 아니라 가는 것”이라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했다. 그런 곳이 이제 사라진다.
이런 상황이 낯설다고 말할 수는 없다. 꾹꾹 눌러 담은 머슴밥과 맛깔나는 된장찌개를 내주던 할머니 백반집도 사라졌고, 과묵한 청년이 기막힌 국물로 국수를 말아 주던 간판 없는 작은 식당도 사라진 지 오래다. 동네라는 소공동체를 향기롭게 해주던 작은 공간들이 그렇게 하나씩 자취를 감춰왔다. 하지만 소설이 문을 닫는다는 사실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소설 주인 염기정은 술 좋아하고 노래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다. 종종 주인의 본분을 잊고 만취해 노래를 불렀으며, 그때마다 손님들은 직접 술병을 나르고 때론 담배 심부름을 해야 했다. 한때 음악을 했고 지금도 간혹 간이공연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른 데서 접하기 힘든 온화하고도 구슬픈 습기가 있어 모두들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어 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좀 가리는 편이었다. 취한 그녀로부터 “너, 앞으로 우리 집에 오지 마”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꽤 있었다. 물론 그런 말을 듣고도 대부분은 얼마 뒤에 다시 나타나긴 했지만.
작은 공간일수록 주인의 성품이 그 공간의 체취를 짙게 만든다. 우리는 느슨하고 따뜻하고 얼마간 퇴폐적인 소설의 공기와 냄새를 좋아했다. 그리고 기타 치면서 노래 듣기와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런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술 먹고 노래하다 종종 새벽을 맞았고 그렇게 한 세월이 지나가버렸다. 나 역시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곳에서 좋은 기억만 남긴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성년이 된 뒤로 떠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던 내게 소설은 ‘우리 동네’를 느낀 유일한 곳이었다.
내가 아는 한 세상에 단 하나 있던 술집이 이제 사라진다. 술집 하나 없어졌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곳에 드나들던 술꾼들은 아마도 사소한 것 하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구원과 위안은 때로 미래의 원대한 것에서보다 오늘의 사소한 것에서 온다. 대체할 수 없을 사소한 위안 하나가 사라진다. 그들에겐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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