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1.08 18:33
수정 : 2016.01.08 18:33
지난해 어르신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두 권의 책 기획에 참여했다. 한 권은 적잖은 관심을 모은 <시가 뭐고?>라는 시집이다. 한글을 깨친 경상북도 칠곡의 ‘할매’들이 생애 처음으로 쓴 시를 묶은 시집이다. 300여편의 시 가운데 시집 출간을 위해 100편을 선정하고, 시의 의미를 생각하는 해설을 쓰는 과정 내내 몹시 즐거웠다. 그렇게 묶인 <시가 뭐고?>라는 시집은 2015년에 출간된 국내의 모든 책들 중에서 한글맞춤법을 가장 많이 어긴 책이라고 단언해도 좋을 법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박차남 할매가 쓴 시 <농가 먹어야지>라는 작품이다. “마늘을 캐가지고 / 아들 딸 다 농가 먹었다 / 논에는 깨를 심었는데 / 검은깨 농사지어서 / 또 다 농가 먹어야지 / 깨가 아주 잘났다”. 비록 대단한 것이 못 되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생활 현장의 언어와 감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마지막 행을 장식한 “깨가 아주 잘났다”라는 표현이 퍽 재미있다. 기성 시인의 시에서 이런 식의 감각적인 생활언어를 본 적이 언제였던가. 할매들이 쓴 시는 외로운 노년을 넘어 ‘함께 살자’라는 감각이 묻어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할매들은 자기 삶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르신들이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르신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보다는 ‘살아남았다’는 표지로서 이해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남는 것이 분리된 셈이다. ‘어버이연합’이라는 이름의 아스팔트 극우보수 어르신들이 신념에 차서 성난 표정으로 이슈가 무엇이든 간에 극우적 사고를 맹렬히 주장하는 모습을 보라. 일본의 한 노인이 노인을 고령자라는 말 대신에, ‘밝게 빛나는 인재’라는 의미에서 광령자(光齡者)라고 쓰자고 한 제안을 어버이연합 어르신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쩌면 그것은 먼저 산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마음과 태도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닐까.
최근 출간된 <나이듦 수업>에서 사회심리학자 김태형은 지금의 노인 세대는 ‘나쁜 분들’이 아니라 ‘아픈 분들’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노인 세대가 ‘반복적으로 패배해온 삶’을 살아온 내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단 한번이라도 ‘시민’으로서 작은 승리를 한 경험이 있었더라면 다른 삶의 무늬를 연출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극우보수파 노인들은 아직도 ‘장기냉전의 20세기’를 살아가는 것일까.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귀환한 작가 장 아메리가 “가끔 히틀러가 사후에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닌가” 장탄식한 표현이 떠오른다. ‘히틀러’ 대신에 ‘박정희’를 집어넣으면 한국적 맥락이 완성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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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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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시대의 우울을 누가 어떻게 치유하느냐이다. 그러나 시대의 우울을 치유하는 주체는 지배 엘리트들의 몫이 아니고, 노년 세대의 몫 또한 아니다. 지배 엘리트들의 본질이란 ‘똑똑한 나쁜 놈들’이라는 점이 2015년 12·28 일본군 ‘위안부’ 한-일 정부 합의에서 확인되었다. 결국, 대한민국의 미래는 청년들의 손안에 있다.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지 말자고 호소하는 ‘대한민국효녀연합’ 청년 예술가들의 손팻말 시위에 묵직한 감동을 받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먼저 산 사람으로서의 ‘책임’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나이듦 수업이 진짜 필요하다. 회의 없는 신념은 위험하고 또 위험하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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