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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25 19:18 수정 : 2006.01.25 19:18

‘지난해보다 건강이 좋아졌나’란 물음에 영국 연금생활자 가운데 소득이 적은 하위계층은 ‘좋지 않다’ 란 답변을 점점 많이 하고 있다. 영국 북부 요크 시내 벤치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연금 생활자 부부의 모습. 김보영 요크 통신원 saekyol@hanmail.net

[2006 연중기획 함께 넘자, 양극화] 1부 건강불평등 사회 ⑦ 블랙리포트의 나라, 영국


1980년 영국에서 발간된 ‘블랙리포트’는 건강불평등 문제를 체계적으로 제기한 이 나라의 첫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사회계층과 지역에 따른 사망률의 차이를 통해 건강불평등 문제를 본격 제기해 영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모았다. 이후 건강불평등 문제는 영·미는 물론 유럽 등에서 학자들 사이에서 활발한 연구 대상으로 떠올랐으며, 영국은 1997년 노동당 정권이 집권한 뒤에 구체적인 정부 정책과제로 채택됐다. 특히 영국의 사례는 건강불평등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사회적 인식을 높인 뒤 이를 줄이기 위한 사업을 펼치고, 범 정부 차원에서 대책에 나서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소득 불평등 해소에 초점
취약지역에 다양한 프로그램
모든 부처 유기적 지원활동

“만약 사람들이 담배끊기를 원한다면, 그들을 먼저 중산층으로 만들어라”

어느 공상가의 말이 아니다. 바로 존 리드 전 영국 보건부 장관이 한 말이다. 이는 영국 건강불평등 정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영국에서 건강불평등 정책은 개인에게 ‘건강을 열심히 돌보라’고 충고하기보다는 그가 속한 세상을 바꾸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건강하지 않는 상태는 상당부분 개인의 힘이 미치지 않는 범위 즉 교육수준, 임금, 고용상태와 같은 사회적 조건에 따라 이뤄진다는 생각에서다.

영국은 남부럽지 않은 의료보장 체계를 가진 나라다. 보건의료시스템이 국가가 국민의 의료를 책임지는 국가보건서비스(NHS)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국에서 소득간, 지역간 건강불평등은 심각한 이슈다. 이는 병원이 병은 고칠 수는 있지만 병의 발생 자체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국가보건서비스가 질병을 예방하는데 일정한 구실을 하지만 소득불평등에 따른 건강불평등 자체까지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건강불평등 문제를 정책적 의제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1980년 발간된 ‘블랙리포트’다. 건강불평등에 관한 가장 선도적이며 체계적 보고서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보수당 정권에 의해 오랫동안 묻혀있다 1997년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권이 집권하면서 빛을 보았다. 마이클 마못 런던대 교수는 “건강불평등을 사회가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는 철학과 정치의 문제”라고 말했다.

블레어 정부는 이후 블랙리포트의 후속편 격인 ‘애치슨 리포트’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는 건강불평등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빈곤, 교육, 고용, 주거, 교통과 같은 사회적 원인을 영양이나 의료이용보다 훨씬 비중 있게 다룬 점이 두드러진다. 이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3가지 사항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첫째, 건강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정책들은 단지 건강상태를 개선시킬지만이 아니라 건강상의 불평등을 일으키는지도 평가해야한다. 둘째, 어린이를 부양하고 있는 가족들의 건강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셋째, 소득불평등을 줄이고 빈곤가구의 표준생계를 향상시키는 조처가 취해져야 한다.


그러나 보건부 전문가인 레이 어리커 박사는 “건강의 사회적 원인을 규명하는 일 못지않게, 이를 정책설계로 바꾸는 일이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1997년 영국 정부에서 시작한 ‘건강행동구역(Health Action Zones)’은 대표적인 건강불평등 해소 프로그램이다. 이는 국가보건서비스, 지방공공기관, 민간부문과 지역사회가 힘을 모아 가장 낙후된 지역의 건강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새 접근법이며 보건사업이다. 취약지역 주민을 중심으로 한 건강증진사업, 도시개발사업 등 종합적인 형태를 띠었다.

1999년 들어 영국 보건부는 ‘건강불평등의 감소-행동강령’을 발표했다. 건강불평등 해소를 국가 건강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실행하는 근거로 ‘건강한 지역사회 건설’을 목표로 내세웠다. 취약아동을 위한 ‘슈어 스타트’ 프로그램 등이 활발히 이뤄지고, 최저임금제도와 세액공제 도입, 급여수준의 증대 등이 목표로 설정됐다.


어리커 박사는 “가장 정치적 반향을 일으켰던 것은 다양한 정부 기관을 건강불평등 정책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예컨대 빈곤아동에 대한 지원은 단지 학교 급식의 개선(보건부)에 그치지 않고, 일정한 교육수준에 오르도록 지원하며(교육부), 그 아이의 부모들에게 우선적인 고용 (노동부) 기회를 제공하며, 만약 편부모라면 더 많은 지원을 제공한다. 이런 모든 일들은 단일 부처가 아닌 범정부적인 지휘 아래 펼쳐진다.” 런던 동북부 보건청의 쉴라 아담스 국장의 말이다. 그는 “이렇듯 모든 부처가 동시에 움직이며, 정부의 여러 곳에서 기금이 지원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부터 영국에서는 뜻 깊은 새 잡지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지자체 저널〉(Municipal Journal)이다. 이 잡지는 지방의 기본의료 단위인 국가보건서비스 트러스트의 건강불평등과 관련한 활동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또 지난해 7월부터 6개월간의 유럽연합 의장국 수행기간 동안 영국은 유럽연합 차원에서 건강불평등을 핵심 의제로 삼은 바 있다. 건강불평등 해소는 이렇듯 이젠 영국을 넘어 유럽 차원에서 확고한 사회정책 의제로 진입하고 있다. 어리커 박사는 그 과정을 “큰 변화가 있었으며, 기나긴 싸움의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런던대 마못 교수는 “만약 건강불평등 관련 정책이 성공을 거둔다면 지금 노동당 정부는 복지와 재원의 재분배를 화려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한 최초의 정부로 기록될 것이다”고 말했다.

취재/기명(런던대 박사과정), 정리/특별취재팀


“정당·지역 초월해 정책 설계 국민들 사회적 문제로 인식”

영국 보건부 어리커 박사

영국 보건부의 레이 어리커(사진) 박사는 토니 블레어 정부 초기부터 줄곧 건강불평등 정책 입안에 참여해온 이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영국에서 “건강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해당 부처가 아니라 전체 정부가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건강불평등이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된 과정은 어땠나.

=1997년 노동당 정부가 집권하면서 건강불평등 문제를 체계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해 11월 애치슨 리포트란 보고서가 나오게 됐다. 이는 건강 불평등의 원인을 단지 흡연이나 음주 때문이 아니라 좀더 다양한 (사회경제적) 원인들의 산물이란 인식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 정책을 지속할 수 있게 된 비결은?

=처음부터 정책이 정당을 초월하고, 지역적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염두에 두고 설계됐다. 국민들이 당면 문제로 받아들이고, 정부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해야만 정책의 수명이 길기 때문이다. 실제 97년 이후 장관이 다섯 번 교체됐지만 정책의 큰 틀은 이어졌다. 정책 설득력도 중요하다. 건강 불평등이 국민의 40%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라고 강조한 점도 먹혔다.

※10년 동안 10%의 격차를 줄이겠다고 했는데, 과연 실현 가능한 목표인가?

=2010년을 목표로 건강불평등 차이를 줄이겠다는 건 정치적 과장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동빈곤 퇴치처럼 우리는 2020년, 또는 2030년에 이르는 장기 목표를 가지고 있다.

※건강불평등은 단지 보건부의 목표만이 아니라, 블레어 정부 전체의 성적을 매기는 주제로 보인다.

=건강불평등은 정부의 한 부처를 넘어서는 공식적 수치로서 여겨지고 있다. 이제는 건강불평등이 주요 정책 가운데 하나로 진입한 것으로 보아도 좋다.

런던 글·사진/ 기명 런던대 박사과정

특별취재팀

이창곤 기자 goni@hani.co.kr

박주희, 김양중 의료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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