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2.16 20:13
수정 : 2016.02.17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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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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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짧은 단편 중에 <어느 가장의 근심>이란 소설이 있다. 여기에는 ‘오드라덱’이라는 이상한 생물이 나온다. 납작한 별 모양의 실패처럼 생겼고, 별 가운데 막대가 튀어나와 있어서 서 있을 수 있다. 이름을 물으면 “오드라덱”이라고 말하고, 어디 사느냐고 물으면 “일정하지 않은 곳에”라고 대답하지만, 그 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생김새에서 짐작할 수 있듯 어떤 효용도 없다.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용히 존재할 뿐이다. 이 글을 읽으며 ‘슬픔’에 관해서 생각했다. 슬픔에 몸이 있다면 저와 같지 않을까? 아무 곳에서도 쓰이지 않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지만, 때로 슬픔은 거기에 조용히 있다. 그리고 가끔은 생각난 듯이 꿈틀댄다. 가장은 이렇게 생각한다. 오드라덱도 죽을까? 죽는다는 건 어떤 목적을 달성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드라덱에게는 아무 목적이 없으므로, 그에게는 죽음도 없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오드라덱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에도 그것이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괴로워진다.” 슬픔은 상대를 해치지 않는다. 슬픔에는 목적이 없다. 그래서 슬픔은 오래간다. 내가 죽은 후에도 슬픔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슬픔의 힘이다. 그 무엇보다도 오래 남아서 우리를 증명해줄 슬픔, 슬픔의 힘. 산책하다가 삼선교 사거리에서 위안부 소녀상을 만났다. 한 슬픔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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