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8.04 18:25
수정 : 2015.08.0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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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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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이 공연되었을 당시 이런 평이 있었다고 한다. “마음이 어지러운 젊은이에 관한 멋진 희곡이다. 이 젊은이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한 시간이면 충분할 연극이 엿가락처럼 늘어나 4시간을 넘겨버렸다. …… 연극이 절반 정도 지났을 때 나는 이렇게 소리 지를 뻔했다. 빨리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인다!”(이현우, <아주 사적인 독서>에서 인용) 줄거리만 간추리는 사람에게는 이 작품이 가진 두툼한 고뇌가 무의미한 중언부언으로 보였을 것이다. 저 긴 우회로야말로 <햄릿>의 아름다움이지만 ‘빨리빨리’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다. 12억 부가 넘게 팔렸다는 판타지 로맨스 소설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이렇게 요약한 트위트를 본 적도 있다. “벨라와 에드워드, 둘이 만나서…… 잤다.” 그 지루하고 긴 눈빛 교환과 삼각관계와 ‘밀당’이 이 소설의 재미인데 말이다. 에움길이 사실은 지름길이라는 걸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길은 그 길 끝에 이르라고 있는 게 아니라 길 위에 서라고, 그 길을 걸으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에둘러 갈수록 길의 목적에 충실한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모로 가야만 서울에 이른다. 내가 속독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책의 한 줄 한 줄이 다 길이다. 그걸 성큼성큼 걷는 이유는 얼른 책의 뒷장을 보기 위해서다. 치워버리려고 읽는 책만큼 재미없는 책도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해율이 낮은 것도 속독법과 그걸 낳은 조급증에 원인이 있는 것 아닐까.
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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