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6.30 19:01
수정 : 2015.06.3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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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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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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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소설 <양산 펴기>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거리 한쪽에 양산 파는 알바생의 목소리가 있다. “다섯단 접이 우산 겸용입니다. 로베르따 디 까메르노 이태리 메이커에 제조는 중국입니다.” 다른 쪽에는 시위대의 구호가 있다. “노조 사무실 야밤 급습이 웬 말이냐 호화청사 웬 말이냐 노점상 철거민 생존권 보장 비리구청장 물러나라.” 두 목소리가 섞이니 이런 말이 나온다. “로베르따 디 까메르노 웬 말이냐 자외선 차단 노점상 됩니다 안 되는 생존 양산 쓰시면 물러나라 기미 생겨요 구청장 한번 들어보세요 나와라 나와라 가볍고 콤팩트합니다 방수 완벽하고요” 혹은 속옷 판매원과 시위대의 목소리가 섞이면 이렇게 된다. “국산 빤스 나와라 양말 세 켤레 구청장 오천원 전통 있고 몸에도 좋은 우리 생존권.” 단순한 착란이 선사하는 유머 같지만 세상에 무의미는 없는 법이다. 저 뒤섞인 문장들은 우리에게, 노점상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구청장은 우리 얘기를 들어보라고, 당신은 지금 오천원짜리라고, 우리의 생존권은 몸에 좋다고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안 되는 생존”을 강요할 거라면, 양산 쓰고 “물러나라”고. 요즘 박근혜 번역기가 유행이다. 비문과 해석 불가로 유명한 대통령 특유의 화법을 평서문으로 풀어주는 페이지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저 꼬인 문장들은 빨간 펜 없이 그 자체로 읽혀야 한다. 번역은 진실을 가린다. 아무리 참담할지라도 우리는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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