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5.31 18:47
수정 : 2015.05.31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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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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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은 유명한 비극 작품이다. 정해진 운명(주인공은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과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그 노력 때문에 오히려 신탁이 성취된다), 그리고 예정된 파국(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맹인이 된다)은 고전 비극의 전형이 되었다. 프랑스 미학자 랑시에르는 이 극이 17세기 연극으로 재현되는 데 세 가지 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 오이디푸스의 도려낸 눈이 보여주는 공포가 너무 크다. 둘째, 신탁이 이미 줄거리의 전개를 예견하고 있어서 흥미를 반감시킨다. 셋째, 러브스토리가 없다. 첫째는 무대에서 보여주기에는 너무 무섭다는 뜻이고, 둘째는 신탁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이 둘을 멋지게 이어줄 연결고리, 이를테면 연애담이 없다는 것이다. 전형은 반복되는 것이지만 시대가 다르면 그 반복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된다. 조만간 국무총리 인사청문회가 열릴 텐데, 비슷한 일이 반복될지도 모르겠다. 첫째, 힘없는 야당 하나쯤은 단칼에 쳐내던 무서운 장면이 계속 무대에 오를 것이다. 둘째, 군 면제, 탈세에서 보수적인 세계관, 여성관에 이르기까지 예측 가능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제출될 것이다. 셋째, 재산증식 이야기는 있겠지만 러브스토리는 없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벌함으로써 비극을 완성했다. 21세기 판본에서는 그럴 것 같지가 않다. 바로 그게 우리의 비극이기도 하다.
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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