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2.13 20:07
수정 : 2015.04.29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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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비에스>(SBS) 주말연속극 <청담동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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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의 TV톡톡
“디자이너는 태어나는 것이다.” 1990년대 드라마 <토마토>의 대사이다. 여기서 태어난다는 건 재능을 뜻했다. 그러나 2012년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에선 출신을 뜻한다. “유학을 가지 못한 처지의 안목은 후질 수밖에 없고, 안목은 태어날 때부터 뭘 보고 자랐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안목, 취향, 아비튀스. 자본은 문화의 외피를 쓰고 몸을 관통한다. 그 결과 계급은 아예 신분이 된다.
<에스비에스>(SBS) 주말연속극 <청담동 앨리스>는 신데렐라 장르 속에 좌절한 청춘의 현주소와 ‘신데렐라 권하는 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은 드라마이다. 세경(문근영)은 예고를 거쳐 명문 여대 의상과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공모전 입상 경력도 있고 프랑스어도 잘하지만, 취업 준비 3년 만에 1년 계약 비정규직으로 취직한다. 주 업무는 동창인 사모님의 쇼핑 심부름이다. 연봉 1300만원에, 학자금 융자는 아직 못 갚았다. 그의 가정은 ‘하우스푸어’이다. 대출 끼고 5억원에 산 아파트가 3억원이다. 계속 이자를 갚았지만, 원금 2억5000만원이 남았다. 30년간 빵집을 해온 아버지는 대형마트의 저가 공세에 폐업하고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의 1년 계약직으로 취직했다. 6년간 사귄 남자친구는 어머니 병원비와 동생 학비로 신용불량자가 되어 다니던 회사의 명품 가방을 빼돌렸다가 여자친구의 돈 500만원과 함께 인사도 없이 출국해버렸다. 반면 청담동에선 수백만원 하는 가방이 불티나게 팔린다. 해외 명품 지사장인 차승조(박시후)는 “나만 못사는 것 같은 공포가 명품을 구매하게 한다”며 고가 정책을 천명한다. 그를 배신하고 ‘청담동 며느리’가 된 여자로 인해 ‘된장녀’를 경멸하게 된 차승조는 세경의 가난한 사랑에 순수함을 느낀다.
그러나 <청담동 앨리스>가 여타 신데렐라물과 다른 점은 ‘순정녀’와 ‘된장녀’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데 있다. 친구들의 ‘된장짓’을 비난하는 세경에게 남자친구는 “너도 예쁜 거 좋아하는 애였다”고 쓸쓸히 말한다. 1억5000만원짜리 보석 보증서가 없어진 건 사모님의 음해가 아니라 세경이 몰래 착용해보았기 때문이다. 제 힘으로 살려고 노력하던 세경이 ‘취집’을 결심하는 것에서 보듯이 욕망은 겹쳐 있으며, ‘순정녀’와 ‘된장녀’는 이분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의 여성이 취하는 선택의 스펙트럼일 뿐이다. 드라마는 신데렐라 되기에 성공한 사모님에게도 그만의 노력과 절치부심이 있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사모는 악녀가 아니라, 세경의 멘토가 된다. 세경이 처음 ‘뚜쟁이’에게 접근하였을 때, 그는 ‘스폰서’를 원하는 여성으로 오인받는다. 세경은 화들짝 놀라지만 곧 “다를 것도 없지”라 말한다. 신데렐라식 결혼이나, 스폰서 만남이나, 성매매나 본질이 다르지 않음을 추인하는 것이다. 사모님은 신데렐라가 되기를 원하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똑바로 보고, 그 욕망을 부인하지 말며,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으라”고 조언한다.
세경이 자기 욕망의 끝을 경험하고, 청담동을 ‘이상한 나라’로 상대화시키며 욕망의 토끼굴을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현실에는 ‘허당’ 로맨티시스트 왕자님도, 사모님 같은 멘토도 없다는 사실이다. 오직 연봉 1300만원에도 명품을 사라고 부추기는 자본의 욕망만 있다. 세경이 토끼굴을 벗어나더라도, 세경에게 ‘닥치고 빙의’된 시청자들은 ‘지름’의 토끼를 쫓아 빚의 굴로 들어설 것이다. 대단한 아이러니다.
황진미/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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