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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04 20:02 수정 : 2015.04.29 16:36

황진미의 TV 톡톡

“조선의 궁궐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나는 … 세종이오.” 요즘 인기있는 온라인 게임 ‘문명’의 내레이션이 말해주듯, 세종은 한국 ‘문명’의 아이콘이다. 만원짜리 지폐에도 있고, 광화문의 흉물스런 동상으로도 있고, 행정수도 이름도 세종이다. 곳곳에 편재한 그분. 그러나 세종의 고뇌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뿌리 깊은 나무>는 한글창제를 둘러싼 갈등을 그린 추리사극이다. <바람의 화원> 원작자 이정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선덕여왕>의 작가 김영현, 박상연이 극본을 맡았다. 여기에 초반부터 눈길을 사로잡은 ‘꽃임금’ 송중기에, 능청과 진지를 겸비한 장혁, 시니컬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한석규, 청초함을 뽐내는 신세경 등 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그런데 한글창제를 둘러싼 갈등이란 게 뭘까? 고등학교 국사와 국어 시간에 세종은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룬 왕’이라는 것과 한글반포를 최만리가 반대했다는 걸 배운 기억이 난다. ‘왕권과 신권의 조화’라. 말이 쉽지 얼마나 밀고 당기는 팽팽한 과정이었을까? 최만리로 대표되는 사대부 지식독점세력의 입장에서 한글은 얼마나 큰 문화충격이었을까?

왕권과 신권은 소설 <영원한 제국> 이후 사극의 주요 테마이다. 한동안 정조시대에 대한 사극이 줄을 이었다. 잠시 ‘조선의 르네상스’라는 환등에 빠지는 듯하다가 천도 직전 죽음을 맞는 정조에게서, ‘강남 땅부자’와 수도는 서울이어야 한다는 ‘관습헌법’에 막혀 실패한 노무현을 떠올리기도 했다.

비대해진 신권을 누르는 개혁군주에 대한 열망은 <선덕여왕>으로 옮아갔다. 신(臣)은 부패한 기득권이요, 백성으로부터 직접 힘을 받는 왕만이 역사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 <뿌리 깊은 나무>는 이러한 생각을 ‘뿌리’부터 재고해본다.

조선의 뿌리는 어디 있는가? 조선을 세팅한 정도전에게 있다. 그의 조선은 주자학의 이념에 따라 사대부의 나라, 즉 신권의 나라였다. 그러나 태종은 정도전의 세팅을 가져오면서 피의 숙청으로 신권을 눌렀다. 1996년 사극 <용의 눈물>은 태종의 패도정치를 “악업은 모두 내가 지고 가니, 주상(세종)은 성군이 되시오”란 한마디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을 통해 이를 철저히 비판한다. 세종은 ‘견제와 균형’의 왕도정치를 표방하지만, 그 긴장을 버티기 위해 더 강한 임금이 되어야 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겹겹의 아이러니를 지닌다. 첫째, ‘뿌리 깊은 나무’란 제목이 한글창제를 함축한 말이자, 세종암살단 ‘밀본’을 가리킨다. 둘째, 세종이 살린 채윤(장혁)이 세종을 원수로 알고 죽이려 하지만, 왕을 죽이려는 그의 행동이 오히려 세종을 돕는다. 셋째, 아버지를 부정하며 정도전의 신권론을 믿은 세종이, 기득권이 된 신권과 정도전 잔당인 ‘밀본’에게 위협받으며 자기부정에 빠진다. 기묘한 역설이다.

정조는 천도를 통해 기득권세력을 제압하려 하였지만, 세종은 한글을 통해 지식정보 독점세력을 깨뜨리려 하였다. 정조와 노무현의 천도는 실패했지만, 세종과 에스엔에스(SNS)의 지식정보혁명은 성공하였다. ‘어린 백성’이 한글 트위트를 날리며, 조중동의 ‘만리’장성을 넘는다. “생큐 잡스, 생큐 세종!”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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