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9.04 20:24
수정 : 2006.09.0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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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 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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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칼럼
며칠 전 일본의 중소도시와 농촌 지역을 다녀왔다. 일본의 중심 지역에 가까운 곳이어서 문화적으로는 대도시 못지않게 발전한 곳이다. 겉으로 나타난 몇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첫째, 도시와 농촌에서 고층 아파트를 하나도 못 보았다. 둘째, 도시주택 주변에는 논과 밭이 주택 사이로 들어와서 도시와 농촌이 자연과 어우러져 아름답고 다정하게 보였다. 이 나라 농민들은 미-일 자유무역협정(FTA)에도 시달리지 않으니 더욱 행복해 보였다.
왜 우리나라 정부는 솔선해서 세계 최강의 농업국, 정부의 보조로 발전하는 농업국과 자유무엽협정을 맺으려 드는가. 미국에 견주면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농업, 외국인 아가씨 아니면 장가도 못 가는 농민, 어린이가 해마다 줄어들어 폐교가 속출하는 농촌,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는 정치인들은 무엇을 바라는 건가. 이런 것을 보살피는 일이 정치 아닌가.
언젠가 한-미 자유무역협정 이야기를 하는 비공식 자리에서 관변 경제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내게 물었다. “선생님! 그럼, 선진국하곤 하지 말고 후진국하고 하란 말입니까?” 이 사람 생각은 선진국으로부터는 얻을 것이 많지만, 후진국으로부턴 얻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 때 시간이 없어, 나는 “아니, 그런 뜻은 아니야”라고 대답하고 말았는데, 여기에서 내 생각의 일단을 밝히고자 한다.
선진국으로부터도 얻을 것이 없는 때가 있고 후진국으로부터도 얻을 것이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선진국이 무엇이고 후진국이 무엇인가. 따지고 보면, 확실한 개념이 아니다. 선·후진국이 고정돼 있는 것도 아니다. 선·후진의 차이는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앞으로 세계 경제의 세력판도에는 지난 300년 동안 일찍이 보지 못한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내가 보기에는 세계의 각 문명의 가치관조차 크게 달라질 것이다.
나는 지난번의 이 칼럼에서, 우리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삼 강조했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대학에서까지 가르친 사람이지만, 지금의 미국 거시·미시 경제정책에는 우리가 참고할 것이 별로 없다고 보며,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부터도 얻을 것이 많지 않으리라고 본다. 세계 최대의 시장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1980년대 이후 불건전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데 대해, 세계적인 관점에서 우려한다. 이 견해의 일단은 내가 한국경제학회에서 발표한 바 있다.
내 말을 믿기 어렵거든, 앨빈 토플러의 최근 저서 <부의 미래>(한국어 번역판)를 읽어 보라. 미국 시스템의 ‘내부 폭발’에 관한 그의 의견은 나의 견해보다 더 신랄하다. 거기에는 미국 문화의 변화와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관한 나의 의견을 뒷받침하는 대목이 많이 있다. 토플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미국 근로자들은 붕괴된 가정과 학교, 의료제도와 씨름하고, 부도덕한 금융기관에 돈을 빼앗기면서 인생을 보낸다.” 또, “대다수 사람들이 전세계에 미국이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믿는 바로 지금, 미국의 중추적 제도의 기반에는 체계적인 붕괴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나는 어떤 정부 고관으로부터 정부는 지금 동시다발적으로 스물 남짓 되는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탁했다. 자유무역협정이 이 나라 문제를 해결할 것은 거의 없다. 에프티에이 입국(立國)? 들어본 적이 없다. 세계 모든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한다고 가정해 보라.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조순/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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