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14 18:31
수정 : 2006.08.14 18:31
|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부총리
|
조순칼럼
모두들 선진국이 되고자 한다. 정치권에서는 여야 구별이 없다. 학계도 역시 같다. ‘선진화’ 구호가 한국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선진화는 좋지만, 선진화 구호에는 문제가 있다.
사실, 한국은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선진국 아닌가. 정보통신(IT) 분야에서는 세계 최강국이 됐다. 반도체·휴대전화·자동차·철강 등에서는 세계 굴지의 대기업을 두고 있다. 조선에서는 세계 최대 수주국이 됐다.
소비를 보아도 선진국 수준이다. 인구 대비 자동차 수, 국토 면적 대비 고속도로의 길이, 모두 세계적이다. 미국·중국에서는 한국인의 부동산 투자가 성행하고, 세계 도처에 한국 관광객이 넘치고 있다. 선진국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는 돈 많은 사람이 많다는 얘기는 될 것이다.
남들이 선진국이라 하는데도, 정작 이 나라에서는, 선진화 구호가 요란한 연유가 무엇인가. 우리 마음이 왠지 허전하여 중심이 잡히지 않고, 나라의 기본이 허약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중소기업 부진, 자영업자 몰락, 청년실업 증가, 상습적 파업, 양극화 심화 등, 이 나라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는 심각하다. 거기에다가 철학 없는 정치, 인간성 없는 종교 등의 간디의 말에, 화목 없는 사회, 내실 없는 문화, 방향 없는 교육 등을 추가하면, 선진화 구호가 저절로 나온다. 나라가 이런 기본 문제를 안고 있는 한, 선진국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 이런 기본 문제를 갖추는 데는 선진화 구호는 소용이 없다. 선진화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미국과 일본을 염두에 두고 있을 터인데, 이 나라들의 현재 모습에서 과연 우리 실정에 맞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입만 열면 미국·일본을 노래해 왔다. 그러나 두 나라의 현재 거시경제 운영이나 미시경제 운영을 모방하면 우리도 선진국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것이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지금 세계에는 선진국/후진국의 구별이 급격히 흐려지고 있다. 선진국 중에 잘 안 되는 나라가 많고 후진국 중에 제대로 되는 나라도 많다. 잘 되는 나라가 있다면, 선진국이건 후진국이건 다 우리의 모범이 된다. 예를 들어 보자. 남미는 불과 몇 해 동안에 많이 달라졌다. 브라질은 지난 4년 동안 재정적자를 완전히 해소했다. 인플레도 없어지고 경상수지도 크게 개선됐다. 브라질만이 아니라, 스페인 계통의 남미 주요국들도 이제 인플레는 한자릿수로 되고, 재정적자도 크게 줄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나게 됐는가. 따지고 보면 별것이 아니다. 9·11 이후,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실사구시의 방법으로 자활의 길을 추진한 결과다. 남의 모델이나 이론을 탈피하여, 각기 나름대로 나라의 기본을 찾은 것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한국 사람들이 과연 진지하게 자기 나라의 기본을 닦아서 나라의 앞날을 타개할 의지가 있느냐다. 선후진을 가릴 것이 아니라, 남의 나라를 편견 없이 이해하고, 그들의 경험을 거울삼아 나라를 좋게 만들 겸허한 자세가 있는가? 있다면, 왜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이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는가? 선진화를 외치지만 그 내용은 무엇이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방법은 무엇인가? 선진화의 내용은 기본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정화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 방법은 실사구시밖에 없다. 겉치레를 버리고 실천을 통해 기본을 닦아야 한다. 단 한 가지만이라도.
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부총리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