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6.26 20:15
수정 : 2006.06.26 20:15
조순칼럼
공산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 아름다운 비전은 계급투쟁과 유물사관 등의 잘못된 역사관이 빚은 무리 때문에 망하고 말았다. 1980년대 초부터 미국은 미국식 자유시장 경제의 전파를 통해, 전세계에 영원한 자유와 번영을 실현한다는 또하나의 유토피아 ‘신자유주의’를 펼치고 있다. 이 비전도 여러 가지 옳지 못한 철학 위에 서 있다. ‘사회적 다윈주의’라는 약육강식의 철학, 상속세·자본이득세 철폐, 사회보장제 민영화 등의 정책 방향, 미국 스탠더드(기준)가 세계 스탠더드로 돼야 한다는 세계관 등이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한다.
이 두 가지 유토피아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세상을 너무 단순하고 일방적으로 본다. 일국의 경제사회에는 국가 기능과 시장 기능 사이에 적절한 분업이 이루어져야 하며,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이 있는데, 공산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유토피아는 이것을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국가를 지상시하고 시장 기능을 무시했다. 소련은 소련식이 아닌 공산주의를 배격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지상시하고 시장이 국가 기능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식만이 유일한 글로벌화라고 여기고 있다.
둘째, 세상을 보는 눈이 무자비하다. 공산주의는 노동자·농민만 위하면 된다고 하고, 평등주의를 외치면서도 가장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냈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에서 이기면 그만이고, 약자를 돌보아주는 몫은 국가가 담당할 것이 아니라, 민간이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그 정치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플루토크라시(금권정치)로 치닫고 있다.
1980년대 초부터의 미국 경제의 동향을 보면, 신자유주의는 세계경제의 건전한 글로벌화는 고사하고 미국 경제 자체를 멍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 경제에는 거시적으로는 천문학적인 쌍둥이 적자가 항상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미시적으로는 사회보장제의 ‘민영화’가 추진됨으로써, 종래 미국 경제를 주도해 온 제조업 대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기업경영은 단기적 이윤의 극대화를 지향한 주가지상주의에 빠져들고 있어, 과거의 미국 자본주의의 건전한 정신을 상실하고 있다.
민간 소득의 ‘양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부유층은 약진하고 있으나, 근로자들의 실질 임금은 전혀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2001년의 기업이윤은 국내총생산(GDP)의 7%였는데 2006년 초에는 12.2%로 증가한 데 비해, 일반 가정의 중간 소득은 오히려 3% 감소했다. 소득분배의 추이는 미국의 빈부격차는 19세기 말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은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필수적이며, 우리나라의 활로도 여기에 있다고 보고 있다. 다만 신자유주의 철학으로는 평화롭고 생산적인 글로벌화는 어렵다고 본다. 나는 얼마 전, 한국경제학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신중론을 폈다. 단기적인 무역이나 농업, 금융 등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이 나라는 자유무역협정이 몰고 올 양극화의 심화와 성장동력의 약화를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 신자유주의의 유토피아는 막강한 미국 경제조차도 견디기 어렵게 만들어 가고 있다. 한국의 허약한 어깨가 이 부담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설익은 자유무역 이론으로 얼버무리지 말기를 바란다.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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