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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12 18:29 수정 : 2020.01.13 11:25

[짬] 자전 에세이 펴낸 주부 윤석영씨

결혼 생활 30년간 혼자 속앓이해온 부부 문제와 가정사를 글로 고백한 윤석영씨를 지난주 서울 반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책을 펴낸 이유를 들어봤다. 사진 서혜빈 기자

“가정 내 문제나 불합리는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왜 사회문제 해결만 외치나요? 어쩌면 ‘부부 관계’ 개선이 좋은 사회 만들기의 첫걸음 아닐까요?”

부부 싸움이나 시댁과의 갈등 등을 입에 올리는 건 일종의 금기로 여겨져왔다. 나이 든 세대일수록 더 그랬다. 기껏해야 내 얼굴에 침 뱉기라는 생각에서다. 그저 주변 지인에게 신세 한탄, 푸념 정도로 풀어버리기 일쑤다.

윤석영(56)씨는 지난 30년간 묵혀온 남편과의 소통 문제를 기어이 풀고 싶었다. “신혼 초기엔 모두 내 잘못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대화가 부족한 거더라고요.” 남편의 마음에 문을 두드리고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쉰이 훌쩍 넘은 아내는 용기를 내어 책을 썼다. 지난해 11월 난생 첫 저서 <아내의 독후감>을 세상에 내놓은 윤씨를 지난주 만났다.

1986년 대학 졸업뒤 대기업 입사
이듬해 ‘사내커플’ 남편과 독일 유학길
공부 접고 먼저 귀국 ‘내조·육아’

“부부 대화 부족 깨닫고 쓰기 시작”
지난해 말 ‘아내의 독후감’ 펴내
“5년뒤 ‘남편의 독후감’ 써준다네요”

1982학년 대학에 들어간 윤씨는 졸업하자마자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했다. 커리어 우먼을 꿈꿨으나 현실은 ‘커피 타는 아가씨, 윤양'이 됐다. ‘재수 없게 여자가 어디서 회의에 들어오느냐'는 상사의 핀잔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1년도 채 안 돼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직장에서 만난 남편을 따라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전공한 독문학 공부도 계속하고, 무엇보다 삶을 같이하는 게 가족의 기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기 반찬이 없으면 밥상에 앉지도 않는 남편의 모습은 시아버지의 불평을 꼭 빼닮았다. 1년만에 공부는 접고, 하릴없이 온갖 종류의 고기로 날마다 남편 밥상을 차려야 했다. 남편의 유학 생활이 길어져 아이들만 데리고 먼저 귀국한 뒤에도 육아와 생계는 오로지 윤씨 몫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 ‘공부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그는 맏딸, 남편의 꿈을 응원하는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책을 통해서라도 남편과 소통하고 싶었던 그의 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책 구성이 괜찮다는 둥, 작가로서 등단하려면 사적인 이야기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둥, 여러 독자들에게 독후감을 받아 조언을 들어보라는 둥.’ 윤씨가 바랐던 남편의 공감, 위로와 격려, 부부간 진솔한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남편한테선 그저 5년 뒤 책을 써 답장하겠노라는 답만 돌아왔다. “남편은 항상 그런 식이었어요. 내가 기대한 건 평가가 아니라 ‘남편에게 받는 독후감’이었는데….”

책은 자식에게 들려주고 싶은 ‘엄마의 독후감’이기도 하다. “부모의 경험이 앞으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살아갈 딸과 아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됐으면 했어요.”

‘추운 겨울 날, 시어머니의 무관심으로 윤씨를 낳은 지 3일째부터 혼자 미역국을 끓여 먹고, 냇가에 나가 손을 호호 불며 기저귀를 빨아야만 했던 엄마. 남편과 시부모의 무시가 당신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던 엄마.’ 윤씨는 책을 쓰면서 내내 친정 엄마를 떠올렸다. “우리 엄마가 겪은 일을 저는 겪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똑같더군요.” 손주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들 이름을 준비하던 시부모님, 며느리에 대한 차별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은 윤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딸만 보면 본능적으로 ‘또 다른 나’라는 생각에 애틋한 마음이 드는 건 그래서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더라고요. 부디 제 딸에겐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아들은 가정을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았지만, 가감 없는 솔직한 고백으로 인해 상처도 입었다. 책을 읽어본 주변 지인들로부터 ‘망신스럽고 당혹스럽다’는 평가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부부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저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겪지만, 누구 하나 먼저 꺼내지 않았던 거죠.”

책의 목차는 널리 알려진 영화나 책의 제목으로 짜여 있다. 한 개인의 가십거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야기라는 점을 드러내보이기 위해서다. “‘영화 속 주인공도 나랑 같은 일을 겪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받은 위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어요.”

“시부모님, 남편, 자식…. 돌이켜보면 지난 30년간 부부 갈등의 원인이 됐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다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죽으나 사나 남은 건 우리 부부 둘 뿐이죠. 서로의 관계를 위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다음 30년을 남편과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요.” 부부 관계가 더는 불합리하거나 불평등하게 느껴져서는 안 된다는 그는 세상에 꺼내기 어려운 가정사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되고 공감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저의 고백이 다른 이들의 생각에도 변화를 가져다줬으면 좋겠네요.”

서혜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연구원 hyeb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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