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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31 17:52 수정 : 2020.01.01 02:35

[짬] 광주시교육청 감사관 퇴임 김용철 변호사

31일로 9년 임기를 마친 김용철 광주시교육청 감사관은 새해 변호사로서 다시 고향 광주에 돌아올 길을 찾겠다고 밝혔다.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김 변호사로 돌아갑니다.” 삼성의 불법 비자금을 세상에 알린 김용철(61) 광주시교육청 감사관이 31일 퇴임했다. 그는 광주 교육계의 ‘포청천’으로 불려왔다. 2011년 임용된 뒤 기관과 학교의 촌지를 일소하고, 성적 조작과 성 비위자 등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얻은 별명이다. 직원들은 그한테 ‘연락 끊지 말고 살아요’라고 쓴 꽃다발을 건네며 서운해했다.

그는 “이쁜 사람과 미운 사람, 누구한테나 불편한 사람이었다. 눈치도 없었다. 하지만 ‘다음 세대가 자라는 학교가 깨끗해야 세상이 맑아진다’고 생각했다. 소신껏 일하고 떠난다”로 했다.

‘광주 교육계 포청천’ 9년만에 퇴임
촌지·성적조작·성비위 등 ‘엄중’
“깨끗한 학교 위해 소신껏 일했다”

법무법인 복귀…광주 ‘분소’ 검토중
“이주민 정착 돕는 ‘법률 상담’ 관심”
“삼성 내외부 감시기능 없다” 비판

그는 지난 9년 동안 꼿꼿한 자세로 일했다. 진영과 지위를 따지지 않았다. 기득권층은 그를 ‘광주 3적’으로 부르며 두려워했다. 명절 떡값을 받은 교장을 파면한 뒤에는 “김용철 이전에 퇴직하면 금메달, 김용철이 있을 때 무사히 퇴직하면 다이아몬드메달, 징계를 받고 나가면 목메달”이라는 수군거림이 나왔다. 내부 직원들은 잔뜩 긴장했고, 감사 현장에선 “김용철이 보내서 왔다”고 하면 저항이 꺾였다. 시민들은 “스승의 날 백화점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지고, 화훼농가는 꽃다발을 팔지 못해 울상일 정도”라며 환호했다.

그는 새해 첫날 임용 전 근무하던 법무법인 우암으로 복직한다. 그는 “우암이 서초·구로·양주 등 3곳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하지만 오갈 데 없을 때 따뜻하게 품어준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다. 광주에 분사무소를 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거들고 싶다. 결혼·취업·귀화 등으로 입국한 이주민이 일상에서 부닥치는 법률적 어려움을 상담해 주는 일에 마음이 간다. 간판을 거는 건 부담스럽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화제를 삼성으로 돌리자 한숨부터 지었다. 그는 “나아졌다는 건 착각인 듯하다. 전에는 생각조차 못 했던 일들을 서슴지 않고 한다. 차라리 비리가 더 심해지고 진화하고 파렴치해졌다”고 했다. 그는 “삼성 미래전략실이 20여개 계열사 직원들의 연말정산 기부금을 뒤져 진보단체 후원자를 색출했다. 경영권 승계를 매듭짓기 위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국민연금을 동원하기도 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래도 내외부에 감시기능은 전혀 없다”고 걱정했다.

검사 출신인 그에게 공직비리수사처 출범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제 우리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됐다. 기왕에 만들어졌으니 독립적이고 전문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이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정치적으로 흥정하지 말고, 올곧은 사람·용감한 사람을 뽑아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고 기대했다.

검사 경력을 후회한 적이 없느냐고 했더니 “공무원은 독직하고, 기업가는 탈세하는 등 곳곳에 범죄가 많았다. 그래서 검사하기 쉬웠다. 그렇지만 상명하복 문화는 싫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경제적으로 늘 여유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독일에 유학해서 법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인간 존엄을 침해하는 국가범죄, 그리고 혁명권·저항권 등을 주제로 정해 두었는데 형편이 나빠져 취업해야만 했다”고 아쉬워했다.

‘딱딱한 법률가’로 알려진 그는 뜻밖에도 음악에 심취해 있다. 그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호른 협주곡(페터 마크 지휘, 런던심포니, 데카, 1964)를 비롯해 엘피레코드 3000여장, 오디오시디 2000여장을 소장한 클래식 애호가다.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음악 듣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학창 시절 그는 동아리에서 하모니카·바이올린·피아노 등 여러 악기를 배워 악보에 비교적 친숙한 편이다. 30대 이후 소리에 민감해지자 직접 납땜용 인두와 저항 계측기를 들고 100여 세트의 오디오를 구성할 정도로 빠져들었다.

“30년 전 충남 홍성에 단신으로 부임했을 때 중고 오디오부터 시작했다. 술집 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음악은 위안과 용기를 동시에 주었다. 삼성 문제로 나락에 빠졌을 때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36곡 전곡을 하루 종일 들으며 다시 일어섰다.”

그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1989~97년 인천지검, 부산지검, 서울지검 등에서 근무했다. 서울지검 검사 때는 전두환·노태우 군사반란과 부정축재 사건을 수사했다. 이어 1997~2004년 삼성 회장 비서실과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으로 일하며 회사의 전방위적 떡값 제공에 의분을 느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 2007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주선으로 비자금 용처를 공개한 데 이어 2010년 <삼성을 생각한다>를 펴냈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사진 광주시교육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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