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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04 18:33 수정 : 2019.12.05 10:29

【짬】 언어학자 곽충구 명예교수

곽충구 서강대 명예교수는 인터뷰 중간 중간 두만강 유역 조선어 방언을 실감나게 들려줬다. 성조가 있는 방언을 정확히 기록하려면 귀가 예민해야겠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학교 다닐 때 방송반 피디를 했고 지금도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원고를 한 번 교정 보는 데만 1년이 걸렸어요. 그걸 나 혼자 서너 번 했어요. 24년 만에 사전이 출간된 이유이기도 하죠.”

최근 상·하 두 권으로 4200쪽이 넘는 <두만강 유역의 조선어 방언 사전>(태학사)을 펴낸 곽충구 서강대 명예교수의 말이다. 사전에는 그가 현지 인터뷰로 확인한 3만2천개의 방언이 담겼다. 현대 한국어의 그릇이 그만큼 넓어진 것이다. 그는 1995년부터 2016년까지 매년 방학이나 안식년에 두만강 유역에 사는 조선족 마을을 찾아 방언을 채록했다. 함경북도에서 이주한 사람이거나 그 후손이 사는 두만강 중·하류 마을 8곳을 주로 찾았다. 이유가 있단다. “서울 사람들이 17~18세기에 쓴 됴+ㅎ+다(좋다), 댜르다(짧다)란 말을 거기서는 지금도 써요. 그들이 쓰는 ‘육진 방언’(함경북도 북부 회령·종성·온성·경원·경흥에서 쓰는 하위 방언)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예전에 쓰던 말이 많이 남아 있어요. 한국어 역사를 아는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지난 29일 오후 경기 고양시 일산구 자택에서 저자를 만났다.

표제어에는 다양한 용례도 있다. 음의 고저를 나타내는 성조 표시도 다 했다. 사전을 만들며 가장 힘들었던 게 말의 뜻을 파악하는 일과 성조 확인이었단다. “한반도 서쪽 지역은 성조가 사라졌지만 경상도나 강원도 일부, 함경도 정평 이북 쪽은 성조가 아직도 있어요. 15세기 중세 한국어 성조와 가장 가까운 게 함경도입니다. 경상도는 가장 멀고요.”

평안도 지역 방언 사전도 만들 요량으로 중국 랴오닝성 선양 거주 조선족과 실향민 등을 대상으로 채록을 해왔지만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평안도 방언) 어휘를 4700개 정도 정리하다 그만뒀어요. 사실 평안도 방언은 음성이 단순해, 성조가 있는 함경도에 견주면 3분의 1 밖에 힘이 안 들어요. 채록한 어휘 수도 적고요. 그런데 (사전 편찬 일을) 계속 하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전을 혼자 만드는 일은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갉아먹어요. 죽어요. 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사전을 오롯이 혼자 힘으로 만들었단다. 제보자 수고료 등 경비도 대부분 그가 부담했다. “2004년과 이듬해 딱 2년 학술진흥재단 지원을 받았어요. 사실 그것도 안 받으려고 했어요. 액수가 많이 깎였거든요. 국가에서 매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죠. 하하, 돈 벌어서 뭐합니까.”

그래도 자신은 사전을 내줄 출판사를 찾았으니 운이 좋은 편이란다. “카자흐스탄 국제관계 및 세계 언어대의 박 넬리 교수가 20년 가까이 중앙아시아 고려인 방언 사전 편찬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어요. 출판사를 찾기 어려운 것도 한 이유일 겁니다.”

연변대 초빙교수로 있던 2002년에는 대학원 강의를 몇 번 한 것을 빼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두만강 유역에서 보냈단다. 그런데도 아직껏 두만강 발원지인 백두산 구경 한 번 못 했단다. “하루에 8~9시간 인터뷰를 합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적어요. 보충 질문하려고요. 숙소에 와서는 이어폰을 끼고 녹음을 풀면서 중요하거나 이상한 내용은 메모합니다. 다음날 확인하려고요. 인터뷰 뒤 밥을 먹고 두만강가로 나와 쪼그려 앉아 북한 땅을 쳐다보는 게 유일한 휴식이었죠. 이렇게 열흘에서 이십일 넘게 강행군을 하면 몸이 물먹은 솜처럼 돼 나중에는 백두산 보러 갈 힘도 없어요.”

<두만강 유역의 조선어 방언 사전> 표지.

사전 출간이 늦어진 이유를 하나 더 들었다. “두만강 유역 한인공동체가 급속하게 무너지는 게 눈에 환히 들어오더라고요. 특히 한인소학교가 많이 없어졌어요. 조선의 말과 글, 역사나 풍속을 가르치는 곳인데요. 중국의 개혁 개방 이후 기차가 오지까지 들어오면서 한인들이 베이징이나 산둥반도, 한국, 일본으로 많이 빠져나갔어요. 전통이나 민속이 없어지기 전에 제가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죠. 그래서 출간을 조금 미루고 관혼상제나 농기구 음식 등 전통이나 생활관습 관련 표제어 조사에 더 힘을 들였어요.”

95년부터 두만강 조선족 마을에서 채록

최근 ‘두만강 유역 조선어 방언 사전’ 내

3만2천 방언에 용례 문장·성조도

사라질 위기 전통·민속 관련 어휘도

“평안도 방언사전 못 끌낼 것 같아

인류학 등 여러 전공 학자들 협업을”

사전에 ‘시월샹산’이란 말이 나온다. 그가 새로 캐낸 어휘다. ‘음력 시월 초승께 추수를 끝내고 떡을 장만해 하늘에 고사를 지내던 의식’이라고 쓰여있다. 저자는 “(시월샹산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함북 일대에서 단군 탄생일을 기념해 집안의 평안을 빌기 위해 하는 행사인 향산제”라면서 이 의식이 중국 문화대혁명 때 사라졌다는 제보자 말을 전했다. 혼사는 ‘혼세’라 하고 중매쟁이는 ‘혼셋권디’라고 한단다. ‘혼세 권디 잘하무 수울(술)이 석 잔이고 못 하무 칼이 석단이고 다부지(쑥) 석 단이구.’(중매 잘 하면 술이 석 잔이고 못 하면 칼 석 단이 들어오거나 집을 태울 수 있는 쑥이 석 단이라는 뜻) 한국인들이 잘 아는 속담 속 ‘뺨 세 대’ 자리에 ‘칼 석 단과 쑥 석 단’이 온 것이다. 중매를 매우 신중하게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자는 풀었다.

사전에는 속담관용구가 1500개나 담겼다. 농경사회 전통을 보여주는 관용구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어시(부모) 없이는 살아두 쉐(소) 없이는 못사우.’ 음식 방언은 재료나 조리법도 상세히 담았다. 예컨대 갓의 일종인 채소 ‘영채’로 담그는 김치인 ‘영채 김치’ 항목에는 김치 담그는 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

곽충구 교수가 방언 채록 때 사용한 녹음기와 카세트 테이프.
방언 제보자를 만날 때는 채록자도 방언을 써야 한단다. 서울말을 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고 제보자도 표준말을 쓰려고 해서다. “인터뷰 전에 방언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날 친족 언어 체계를 조사한다면 먼저 ‘아바지의 아바지는 무스거라고 하암둥’ 이렇게 물어요. 무스거는 중세 국어로 무엇이죠. 어떤 때는 주제를 정해 묻기도 하죠. ‘혼세르 엇띠 했슴둥’ 물으면 혼사나 중매에 대한 말을 줄줄이 합니다. 생식기와 같이 민망한 주제를 물을 때는 할머니들은 나가시라고 하고 할아버지들한테만 물었죠.”

방언 채록을 하며 가장 기쁜 순간은 역시 새로운 어휘를 만날 때이다. “새 어휘를 만나는 것은 그간 몰랐던 우리 전통문화를 새로 아는 것과 다름없죠. 전통문화를 기술한 게 언어이니까요. 새 말을 알려주는 제보자에게는 쳐다보면서 ‘아이구 아심ㅌ+ㅒ니꾸마’라고 합니다. ‘아심ㅌ+ㅒ니+ㅎ다’는 남의 호의가 미안하면서도 고마울 때 쓰는 방언입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방언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몇십 년 채록했는데 한 두 단어를 묻는 것은 너무 가혹해요. 답할 수가 없군요.”

그는 서울대 국어교육과 70학번으로, 석사와 박사는 서울대 국문학과에서 마쳤다. “한국어 음운에 관심이 많았어요. 세종대왕이 조선 사람들의 말소리를 체계적, 과학적으로 분석해 훈민정음을 만들었거든요. ‘댜르다’가 600년이 흘러 ‘짧다’가 된 과정이 궁금했어요.”

박사 학위는 육진 방언을 다뤘는데 사연이 있단다. “핀란드 외교관이자 알타이어학자인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1873~1950)가 쓴 책에서 우연히 러시아 제정 때인 1904년에 나온 <시험적인 노한 소사전>이란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저자가 한국어 공부를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언급했거든요. 러시아어 어휘에 대응하는 한국어나 간단한 뜻풀이를 키릴 문자와, 음성을 정밀하게 기록하는 보조기호까지 써 매우 정확히 표기했어요. 러시아 카잔 동방정교회에서 간행한 이 사전을 헬싱키대 람스테트 문고에서 찾아내 박사 논문을 썼어요. 운이 좋았죠. 거기 나오는 한국어가 그 시절 연해주 지역에 살던 한인들이 쓴 전형적인 육진 방언입니다.”

곽충구 교수의 방언 채록 노트. 새 어휘를 찾기 위해 그림도 그려야 한단다.
곽충구 교수. 강성만 선임기자
사전을 홀로 만드는 일은 그의 표현대로 죽을 만큼 힘이 든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무래도 민족에 대한 애정이 아닐까요. 연변대 교수가 저한테 ‘왜 싸서(사서) 고상(고생)하우’라고 해요. 그때 이렇게 답했죠. ‘30년이나 100년 뒤 중국 땅에 우리 민족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때 우리 민족이 이런 언어와 문화로 살았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다.’ 남북이 허리가 잘렸잖아요.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고구려 생각을 많이 했어요. 중국에 55개 소수민족이 있는데 지금 우리 민족만 언어가 남아 있어요. 만주 퉁구스어 계통인 만주어 사용자는 스무명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가 모은 어휘들의 상당수도 이미 사라졌다고 했다. “제가 만난 제보자들은 지금 대부분 80대 이상입니다. 그 아래 세대는 연변 표준어 교육을 받았어요. 북한어 교육을 받기도 하고 한국어도 많이 씁니다. 냉장고 삥샹(중국어)처럼 이중언어를 많이 써요. 위 세대의 말이 전해지지 않고 있어요.”

곽 교수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방언 사전 편찬은 민족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처럼 방언 조사 때 언어학자뿐 아니라 인류학자나 민속학자도 협업해 질문지도 만들고 전통문화도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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