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14 18:56
수정 : 2019.11.15 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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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도 노근리 유족회 부회장. 사진 노근리 국제평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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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노근리 유족회 정구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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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도 노근리 유족회 부회장. 사진 노근리 국제평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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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26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는 숨쉬기조차 힘들 만큼 뜨거웠다. 매미 소리가 유난히 요란한 정오 무렵 창공에서 미군 폭격기 굉음이 일었다. 작열하는 태양 빛 사이로 포탄과 총알이 비처럼 쏟아졌다. 피난길에 오른 주민들은 경부선 철길과 쌍굴다리 근처에서 힘없이 스러졌다. 뒤에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226명, 유족은 2240여명에 이른다. 1999년 <에이피>(AP)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철저하게 가려져 있던 노근리 사건이다.
양해찬(79) 노근리 사건 희생자 유족회장은 13일 “전쟁이 난 것도 모를 정도로 한적한 시골에 나타난 미군이 마을을 비우라고 했다. 모두 믿고 집을 나섰는데 엄청난 화를 입었다. 그때를 한시도 잊은 적 없다”고 회상했다. 열 살이던 양 회장은 당시 할머니·형·동생을 한꺼번에 잃었고, 평생 한을 안은 채 살아왔다.
사건 발생 70돌을 앞둔 노근리 유족회 등은 가해자 미국, 미군과 해원을 준비하고 있다. 노근리 사건과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내년 6월 25일 무렵에 미국 수도 워싱턴 등지에서 ‘한·미 추모와 치유, 그리고 평화’ 행사를 할 참이다.
정구도(64) 유족회 부회장 등은 지난달 미국을 방문해 미국 기독교 교회협의회 관계자 등과 일정을 협의했다. 정 부회장은 노근리 사건 7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 추진단장을 맡고 있다.
유족회 등은 미국 워싱턴 상원의원회관에서 한·미 평화회의를 열고, 노근리 사건 사진·기록 문서 전시회를 하기로 했다. 정 부회장은 “벌써 70년이 흘렀다. 이제 노근리를 뛰어넘고 미래로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건 가해자인 미국, 미군과 화해를 하려 한다. 인류 평화를 위한 다양한 주제를 깊이 있게 논의하는 평화회의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70돌 맞아 미국서 평화회의 추진
참전 미군, 종교 지도자 등 초청
노근리 사건 사진·기록 전시회도
“아픔 죄책 지닌 미군과 화해해야죠
노근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평화와 인권 중요성 일깨울 터”
그는 노근리 사건을 미국에 각인하는 산파 역할을 해왔다. 2006년 노근리 유족회를 꾸릴 때 아버지 고 정은용 선생은 초대 회장을 맡았고, 그는 대변인으로 참여했다. 2001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한테서 “노근리 사건은 유감이었다”는 성명을 끌어내기도 했다.
2010년 노근리 국제 평화재단을 창립해 미국 등 국내·외에 노근리 사건을 알리고, 진상 규명하는 데 힘써 왔다. 2017년 11월 노근리를 찾은 허버트 넬슨(60) 미국 장로교단 사무총장 등을 통해 미국 정부에 노근리 사건 해결을 촉구하기도 했다. 미국 장로교단은 희생자·유족 배상 요구 등을 담은 노근리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넬슨은 “미국 정부가 노근리 사건을 인정하고, 미국이 사건 희생자·유족 등을 위해 옳은 일을 하도록 교회의 소명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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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은용 노근리 유족회 초대회장과 그의 아들인 정구도 유족회 부회장. 사진 노근리 국제평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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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도 노근리 유족회 부회장과 허버트 넬슨 미국 장로교단 사무총장. 사진 노근리 국제평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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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장로교단과 맺은 인연은 지금도 이어진다. 노근리 사건 70돌을 맞아 노근리 사건 희생자 추모, 한국전쟁 참전 미군과 노근리 유족 치유,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한미 연합 예배도 추진한다. 미국 워싱턴 성 마르코 성공회 교회를 후보지로 염두에 두고 있다. 예배엔 미국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등 교단·종파를 망라한 종교 지도자와 시민단체, 참전 미군 등도 초청할 계획이다.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 교회 신부 등은 노근리 사건 70주년 워싱턴 준비위원회를 꾸리는 등 한미 연합 행사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정 부회장은 “세계의 중심인 워싱턴에서 한국전쟁의 아픔인 노근리 사건을 해원하려 한다. 유족 못지않은 아픔과 죄책을 지닌 미군과 화해하고, 서로 치유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고 말했다.
영동군과 노근리 유족회 등은 국내에서도 뜻있는 70돌 행사를 진행할 참이다. 내년 6월 8일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노근리 사건 70돌 합동 추모식을 하고, 이어 세계 50여 개국 인권 운동가와 일본 히로시마 역사박물관 등 아태평화박물관 네트워크 등이 참여하는 노근리 글로벌 평화포럼을 열 계획이다. 서울, 광주, 제주 등에서 인권 평화 사진·영상 순회 전시, 평화 토크 콘서트, 노근리 사건 피해자 구술·자료집 발간 등도 추진한다. 정 부회장은 “70돌을 맞은 노근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나라 안팎에 노근리의 진실을 알리고 진상을 규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근리는 전쟁의 아픔을 딛고 세계 평화와 인권 중요성을 일깨우는 시금석이 되려 한다”고 말했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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