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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3 23:41 수정 : 2019.11.04 21:04

[짬] 일본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 이노우에 가츠오

한·일동학기행시민교류회 대표인 이노우에 가츠오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가 지난달 30일 나주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일본군과 나주 동학농민 혁명'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 안관옥 기자
“100년 넘게 묻혔던 동학 농민군 대학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한국·일본의 자료를 발굴하는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일본의 원로사학자인 이노우에 가츠오(74)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는 지난달 30일 전남 나주시(시장 강인규) 주최로 나빌레라문화센터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한일 학술대회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그는 일본 학계에서 드문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로 일본의 제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해온 지식인이다.

‘한에서 흥으로 승화하다’ 제목으로 열린 이날 학술대회에서 가장 먼저 주제발표를 한 그는 숙연한 표정으로 “125년 전 나주성에 일본군 대대 병력이 입성했다. 이후 벌어진 잔혹한 토벌전의 역사와 진상을 밝힐 책임을 다하지 않은 데 대해 일본인으로서 깊이 사과를 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나주 심포지움에 감사와 사죄의 메시지’를 친필로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달 30일 나주 ‘동학혁명’ 학술대회

1894년 2차 봉기때 일본군 ‘병사일기’

“나주성 남문 밖 동학군 주검 산더미”

24년전 홋카이도대 ‘동학당 유골’ 발견

한국 송환 앞장서며 동학사 연구 매진

“묻혀있는 자료 발굴·진상 밝히겠다”

이노우에 가츠오 교수가 지난 10월30일 발표한 친필 ‘사죄의 메시지’.
그는 이날 일본인으로서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물음에 “역사학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일본군이 농민군을 참혹하게 살육했던 사실을 일본에선 거의 모르고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농민군을 향해 저지른 반인륜적 악행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이어 “처참했던 토벌작전의 전체 상황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대학살이 인도주의에 어긋나고 국제공법을 위반하는 것인데도 일본은 역사를 밝히려고도, 책임을 다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숨지었다.

애초 메이지유신사를 전공하던 그는 24년 전 홋카이도대학에서 동학 지도자의 두개골을 발견하면서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95년 홋카이도대학 후루카와 강당의 표본창고에서 우연히 찾아낸 두개골 표면에는 ‘동학당 수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별지에는 ‘동학 농민군 수괴의 참수된 유골, 전남 진도에서 1906년에 가져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는 유골의 신원을 밝히기 위해 진도를 직접 찾아갔다.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동학농민혁명 연구로 확대됐다. 그때부터 진도를 세 차례 방문하고, 동학유적 등을 20여 차례 답사하는 등 그는 한국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지난 1996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대표단이 일본 홋카이도대학을 방문해 ‘동학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반환받고 있다. 왼쪽 둘째부터 한승헌 이사장, 한사람 건너 장영달 위원, 이노우에 가츠오 교수. 이 유골은 23년만인 지난 5월에야 전주 완산칠봉 투구봉에 안장됐다. 사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제공
그는 1996년 이 유골을 한국으로 송환하는 데도 앞장섰다.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그때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이사장 한승헌)에게 이를 선뜻 돌려주었다. 이를 계기로 박맹수 원광대 총장, 이이화 재야 사학자 등 동학 연구자들과 학술 성과를 공유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토벌군의 자료에 접근했다. 그는 반봉건 성격의 1차 봉기(1894년 3월 무장기포) 상황보다 반외세를 내세운 2차 봉기(같은 해 9월 삼례기포) 이후 전개에 연구의 초점을 맞췄다. 2차 봉기는 같은 해 6월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에 분노한 항일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일본군은 대대 병력을 토벌대로 보냈다. 일본군은 스나이더소총, 농민군은 죽창이 무장의 상징이었다. 농민군 5만여명이 희생됐고, 일본군의 피해는 미미했다. 200대1의 군사력으로 충돌한 상황에서 피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청일전쟁 중이던 일본 대본영은 농민군을 한반도의 남서쪽으로 몰아 재기하지 못하도록 남김없이 섬멸하려 했다.(동북쪽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 러시아의 간섭을 피하고, (베이징 침공에 앞서) 병참선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전례없이 가혹한 섬멸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노우에 교수는 10년 이상 집요한 추적 끝에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의 문서<동학당 정토 경력서>, 미나미 고시로 대대장의 기록 <동학당 정토 약기>, 종군병사의 일지와 편지 등을 찾아 토벌의 참상을 재구성했다.

그는 “병사의 종군일지를 보면 ‘나주성 남문 밖 야산에는 동학군 주검이 680여명에 이르렀다. 고문받고 살해당한 주검들로 악취가 심하고, 부근 땅은 흘러나온 기름이 얼어붙어 마치 백은(白銀) 같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본영 주변이 이러하니 장흥, 강진, 해남 등 토벌 현장의 처참함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의 자료 발굴에도 기대를 보였다. 그는 “토벌군이 문서를 다량 탈취했다는 기록이 곳곳에 나온다. 이 문서들은 공사관으로 전달됐다. 2차대전 패전 때 문서 상당수가 사라졌지만, 외교도서관과 지역도서관 등을 두루 뒤져보겠다”고 했다. 최근 한일 동학기행 시민교류회의 대표를 맡은 그는 내년부터 한일 공동연구 추진, 동학혁명 유적 답사, 농민군 위령비 건립 등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노우에 교수는 교토대 문학부에서 일본사 중 에도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 시기를 공부했다. 이어 33년 동안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역사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필생의 연구로 <일본근현대사 1-막말·유신>, <막말유신 정치사 연구> <일본의 역사18-개국과 막말 변혁> 등 저서를 발간했다. 공저로 동학 연구의 결과를 공유한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경상도 구미 동학농민혁명> 등을 내기도 했다.

이날 학술대회에 앞서 나주시와 원광대, 한·일동학기행시민교류회는 ‘나주동학 위상 정립과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한·일 동학기행 시민교류 등 학술교류와 공동연구를 위한 협약’을 맺었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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