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31 11:49
수정 : 2019.10.31 19:40
[짬] 이기홍 선생의 딸 이경순 전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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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을 했던 이기홍 선생의 평전 출간기념회를 마련한 딸 이경순 전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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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머리가 빡빡 깎인 채 비쩍 마른 모습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하고 광주역에 도착한 아버지 곁에 다가가기가 꺼려졌다. 1958년 가을이었다.’ 이경순(68) 전남대 명예교수(영문과)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첫 인상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던 아버지 이기홍(1912~96) 선생은 3년6개월만에 출소했다. <민족·민주·통일운동가-이기홍 평전>(도서출판 선인) 출간기념회가 31일 오후 5시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중회의실 301호에서 열린다. 이 교수는 “역사에서 외면당한 여러 혼백들의 치열한 삶을 전달하는 아버지의 ‘기억서사’가 평전으로 나와 기쁘다”고 말했다.
‘민족·민주·통일운동가 이기홍 선생’
유고집 이어 김명기 작가 ‘평전’ 집필
31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출간기념회
광주고보때 ‘독립운동’ ‘백지동맹’ 퇴학
일제부터 유신까지 수차례 12년반 ‘옥고’
“역사가 외면한 혼백들 지혜 전달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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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민주·통일운동가-이기홍 평전> 출판기념회가 31일 오후 5시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중회의실 301호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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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의 삶은 “민족 수난사의 축소판”이었다. 전남 완도에서 태어난 이기홍은 1929년 광주고보 2년 재학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가했고, 이듬해 ‘백지동맹’을 주도해 퇴학당했다. 고금도로 낙향해 농민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던 이기홍은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의 주역으로 4년반동안 구금과 감옥 생활을 했다. 이승만 정권 때는 친동생과 매제가 살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 사회적 실천에 참여하며 몇차례나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겼던 이기홍은 일제 강점기 이후 평생토록 12년 6개월동안 투옥생활을 했다.
평전은 이기홍의 유고집(2016)을 만든 김명기 작가가 맡았다. 김 작가는 이기홍이 1990년대 초 시력을 잃고 대학생들에게 받아 적게 한 구술 4천여장을 선별해 유고집을 낸 인연이 있다. 김 작가는 “독립운동부터 통일운동까지 한국 현대사의 전 과정을 몸으로 체험하신 분이 여태껏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고집은 근대사·철학·인류학 관련 생각을 담은 터라 이기홍의 삶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 교수는 “아버지의 삶을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평전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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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졸업식에서 함께 한 이기홍(왼쪽) 선생과 막내딸 이경순(오른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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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작업은 쉽지 않았다. 광주·전남권에서 활동하며 늘 경찰에 쫓기는 지하생활을 하던 터라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년 빨치산 출신 김세원 선생의 <비트>라는 자서전과 각종 판결문 자료, 김시현·전홍준·안종철 등의 인터뷰를 통해 빈 공간을 메웠다. 김 작가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피어린 행적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죽는 날까지 안타까워했다. 그 동지들의 이름 하나라도 남기기 위해 보이지 않는 눈으로 기록을 구술하던 장면을 상상하면 엄숙한 외경심이 든다”고 적었다.
평전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과의 인연도 나와 있다. 명문 광주고보 2년생 이기홍은 1929년 6월 친구의 권유로 무등산에 올랐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던 비밀결사체 ‘독서회’ 모임이 공식 출범하는 자리였다. 그때 광주고보 졸업생 장재성을 처음 만났다. 이기홍은 1930년 1월 8일 휴교 조처 이후 치러진 시험에서 “교실에서 나가자”고 주동해 퇴학당했다. 1950년 7월 ‘보도연맹원’으로 끌려간 이기홍이 갇혔던 광주형무소에서 장재성은 즉결 처형됐다.
완도 고금도 용지포 투쟁 기록도 눈길을 모은다. 1930년 11~12월 고금도에서 용지포 간척지를 둘러싼 일본인 지주와의 분쟁 때 농민조직을 이끈 이가 당숙 이현열이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며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강제 귀국당했던 이현열은 이기홍 등 고금도 청년들과 함께 지주한테서 일부 토지를 양여받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이기홍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던 이현열은 경찰의 탄압으로 10개월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폐렴에 걸려 1933년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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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24살 청년 이기홍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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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선생은 1996년 84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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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역시 많은 시련을 겪었다. “박정희 정권 땐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돌아온 아버지의 피 묻은 셔츠를 보고 가족들은 모두 경악했지만 누구에게도 말 한마디 하소연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머니가 충장로에서 서점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아버지의 광주고보 후배이기도 했던 세 오빠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돌아가신 동지들을 일일이 찾아 독립유공자 공적서를 작성할 무렵, 판결문 등을 곁에서 읽어드린 막내딸 여고생”이었던 이 교수도 대학 때 학생운동을 했다. 이 교수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글을 읽으면서 한 소년의 의식이 깨어나는 모습을 소름 돋게 떠올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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