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원장실에서 만난 노태맹 시인.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게 고통 없는 죽음 아니냐고 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요양병원 환자들에게) 죽음의 순간은 그리 괴롭지 않아요. 나이 들면 깊이 생각하기도 힘들어요. 사고가 희미해지죠. 대부분 돌아가실 때 스르르 가십니다.” 요양병원에는 장례식장도 있다. 책의 한 대목이다. “내가 주치의를 맡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식장에 갈 때, 고운 얼굴의 영정 사진을 보며 이분이 내가 아는 그분이 맞나, 의아할 때가 많다. 너무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 너무 고운 사람이 사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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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맹 시인이 최근 펴낸 에세이집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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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간 사망진단서 700장 썼죠”
죽음·늙음 지켜본 에세이집 출간
‘굿바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인의협 노동인권위원장·‘뉴스민’ 대표 “역사에서 죽어간 사람들 불러줘야” 그는 1981년 영남대 의대에 들어가 1995년에 졸업했다. 이 사이에 계명대 철학과에 들어가 3학년까지 다녔다. “졸업정원제에 걸려 의대를 2년 다니고 제적당했죠. 나중에 구제받아 복학했어요.” 1990년 <문예중앙>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해 지금껏 3권의 시집을 냈다. 2005년엔 경북대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를 땄고 지금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주변에서 뭔 욕심을 그리 부리냐는 말을 많이 해요. 욕심은 아니고 사는 게 궁금해 공부합니다. 우리 삶들이 이렇게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나이 들면서 많이 합니다.” 그는 현재 대구·경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대구 인의협) 노동인권위원장을 맡고 있다. 대표도 지냈다. “우리 병원 의사 5명 중 4명이 대구 인의협 대표를 했죠. 최근 한 달 이상 이어지는 김천 톨게이트 노동자 농성장에는 4번 갔어요. 진료하고 약을 주었죠. 5년 전 차광호 해고노동자가 왜관 스타케미칼 공장에서 고공농성을 할 때는 48m 굴뚝 위를 10번 올라갔어요. 몸 상태를 보려고요.” 그는 대구·경북 지역의 대표적 진보언론 <뉴스민>의 대표이기도 하다. “후원회장 정도의 역할이죠. 별도 도움을 주지 못해 기자 4명에게 많이 미안해요.” 그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에리히 프롬의 책을 여러 권 읽었어요. 그때 마르크스를 처음 만났죠. 지금도 노동자 중심성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저의 기본적 고민은 같이 잘 살면서 나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석사 논문을 쓴 프랑스 사상가 에티엔 발리바르(1942~)는 자유와 평등은 서로 같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죠.” 아무 데나 구부러져 있는 할머니들을 볼 때 많이 우울하다는 그에게 병원을 옮길 생각은 없냐고 하자 고개를 저었다. “어딜 가든 힘들어요.” 말을 이었다. “제 주제가 원래 죽음이었어요. 12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죠. 고교에 다닐 때는 종교에 빠져 신부가 되려고 했어요. 그때 예수의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제가 보는 좋은 시의 기준도 죽음을 밑에 깔고 있느냐입니다. 운동도 자기 삶 전체를 던져야 합니다.” 내년 출간 예정인 네번 째 시집 제목도 ‘물 불 흙 공기 4원소의 진혼곡’이란다. “죽음에 대한 문제를 우리 역사와 결합하려고 해요. 역사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어요. 누군가 그들을 불러주는 게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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