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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14 20:39 수정 : 2019.10.14 20:45

[짬] 요양병원 의사 노태맹 시인

병원 원장실에서 만난 노태맹 시인.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게 고통 없는 죽음 아니냐고 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요양병원 환자들에게) 죽음의 순간은 그리 괴롭지 않아요. 나이 들면 깊이 생각하기도 힘들어요. 사고가 희미해지죠. 대부분 돌아가실 때 스르르 가십니다.” 요양병원에는 장례식장도 있다. 책의 한 대목이다. “내가 주치의를 맡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식장에 갈 때, 고운 얼굴의 영정 사진을 보며 이분이 내가 아는 그분이 맞나, 의아할 때가 많다. 너무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 너무 고운 사람이 사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강성만 선임기자
노태맹 시인은 의사다. 2006년부터 경북 성주의 한 노인요양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13년 동안 사망진단서를 700장 정도 썼어요. 그만큼의 죽음을 지켜보았죠. 3분의 1 정도는 가족이 지켜보지 않은 죽음이었어요.” 그는 최근 낸 에세이집 <굿바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한티재)에서 “죽음은 이해할 수도 완성할 수도 없다”고 썼다.

지난 11일 병원에서 만난 그에게 ‘13년이 지나 죽음에 대해 달라진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길을 가다 노인을 보면 친절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또 있어요. 귀신이 나타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아요.” 책은 요양병원에서 겪고 느낀 이야기이다. 병원에서 만나는 쓸쓸한 늙음과 죽음에 대해 반복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낸다. “저렇게 떠나는 게 맞는가, 그런 생각이죠. 손님이 집에 올 때도 집 앞까지 나가 잘 가라고 바이바이 하잖아요. 누군가 같은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는 이들에게 잘 가라고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 사회가 잘 가라고 해줘야겠죠.” 그는 병원의 월급쟁이 원장이다. 환자는 180여 명이다. 20%가 치매 환자다. 직원은 의사 다섯을 포함해 70명 가까이 된단다.

노태맹 시인이 최근 펴낸 에세이집 표지.
“요양병원은 우리 사회의 죽음과 늙음에 대한 태도가 구조화된 곳이죠.” 사회가 죽음에 대해 전보다 더 많은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죽음을 숨기죠.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죽음이 더 공포스러운 이유죠. 예전엔 집 바로 뒤에 무덤이 있었잖아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 “죽음이 돈이 되지 않아서이죠. 죽음은 아름답지 않잖아요. 덮어놓고 치우려고만 합니다. 사회가 돈을 적게 쓰고 효율적인 것만을 추구하잖아요.”

100년 뒤 역사가들은 지금의 요양병원을 두고 ‘야만’이란 말을 쓸 것이라고도 했다. “18, 19세기 병원이 처음 생겼을 때는 수용이 기본 목적이었어요. 그때 병원 환경은 지금 기준으로 야만적이었죠. 그때보다 발전했지만 더 나아져야죠.” 그리고 ‘개인의 존엄성’을 이야기했다. “요양병원 환자들 사이에는 관계가 없어요. 이야기도 친한 사이에 하잖아요. 하루 종일 가만히 있거나 천정을 보거나 누워 있어요. 아픈 분들이라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요. 점점 이기적으로 변하고 자주 싸웁니다.”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말을 인용했다. “과거에는 몇몇 역적들 목을 쳐 죽이고 다른 사람들은 살게 내버려두었는데, 지금은 몇몇만 살게 해주고 나머지는 죽게 내버려둔다고 푸코가 썼어요. 지금 이곳을 두고 한 말 같기도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하자 그는 “잘 모르겠다”며 이런 말을 했다. “아내에게 나이 들면 친구들과 같이 살자고 말합니다. 같이 외롭지 않게 살자고요.” 노인들이 거실이 있는 자기 집이나 각자의 독립 공간이 있는 또래 공동 거주지에서 삶을 영위하고 국가의 의료서비스 지원을 받는 돌봄 체계를 꿈꾸지만 이게 우리 사회에서 가능할 것 같지 않다고 했다. “돈과 효율성만을 따지기 때문이죠.”

2006년부터 성주 노인요양병원 원장
“13년간 사망진단서 700장 썼죠”
죽음·늙음 지켜본 에세이집 출간
‘굿바이, 마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인의협 노동인권위원장·‘뉴스민’ 대표

“역사에서 죽어간 사람들 불러줘야”

그는 1981년 영남대 의대에 들어가 1995년에 졸업했다. 이 사이에 계명대 철학과에 들어가 3학년까지 다녔다. “졸업정원제에 걸려 의대를 2년 다니고 제적당했죠. 나중에 구제받아 복학했어요.” 1990년 <문예중앙>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해 지금껏 3권의 시집을 냈다. 2005년엔 경북대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를 땄고 지금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주변에서 뭔 욕심을 그리 부리냐는 말을 많이 해요. 욕심은 아니고 사는 게 궁금해 공부합니다. 우리 삶들이 이렇게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나이 들면서 많이 합니다.”

그는 현재 대구·경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대구 인의협) 노동인권위원장을 맡고 있다. 대표도 지냈다. “우리 병원 의사 5명 중 4명이 대구 인의협 대표를 했죠. 최근 한 달 이상 이어지는 김천 톨게이트 노동자 농성장에는 4번 갔어요. 진료하고 약을 주었죠. 5년 전 차광호 해고노동자가 왜관 스타케미칼 공장에서 고공농성을 할 때는 48m 굴뚝 위를 10번 올라갔어요. 몸 상태를 보려고요.” 그는 대구·경북 지역의 대표적 진보언론 <뉴스민>의 대표이기도 하다. “후원회장 정도의 역할이죠. 별도 도움을 주지 못해 기자 4명에게 많이 미안해요.”

그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에리히 프롬의 책을 여러 권 읽었어요. 그때 마르크스를 처음 만났죠. 지금도 노동자 중심성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저의 기본적 고민은 같이 잘 살면서 나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석사 논문을 쓴 프랑스 사상가 에티엔 발리바르(1942~)는 자유와 평등은 서로 같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죠.”

아무 데나 구부러져 있는 할머니들을 볼 때 많이 우울하다는 그에게 병원을 옮길 생각은 없냐고 하자 고개를 저었다. “어딜 가든 힘들어요.” 말을 이었다. “제 주제가 원래 죽음이었어요. 12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죠. 고교에 다닐 때는 종교에 빠져 신부가 되려고 했어요. 그때 예수의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제가 보는 좋은 시의 기준도 죽음을 밑에 깔고 있느냐입니다. 운동도 자기 삶 전체를 던져야 합니다.”

내년 출간 예정인 네번 째 시집 제목도 ‘물 불 흙 공기 4원소의 진혼곡’이란다. “죽음에 대한 문제를 우리 역사와 결합하려고 해요. 역사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어요. 누군가 그들을 불러주는 게 필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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