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the) 친절한 기자들
한국과 수출 경쟁국들도 원전 산업 구조조정·에너지 전환 추진
원전 수출은 기술력보다 경제성, 경제성보다 외교·정치가 변수
거래가 성사되려면 판매자와 구매자의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최근 원자력발전소 수출과 관련해선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무시하는 주장이 넘쳐납니다. 상대국과 협상이나 계약이 조금만 ‘흔들’해도 “탈원전 때문”이라는 말부터 나옵니다. 마치 한국의 에너지 정책이 세계 원전 시장의 가장 큰 변수인 것처럼 말이지요.
원전 수출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기술력, 경제성, 각국의 에너지·안보·국방·외교 정책과 정치력 등이 복잡하게 얽힌 고차 방정식입니다. 한번 삽을 뜨면 완공까지 10년 안팎의 시간이 걸리고 수조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프로젝트이니 당연합니다. 따져야 할 게 워낙 많아 협상이 오래 걸리고, 그 기간 예상치 못했던 정치·경제·사회 변수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한국이 수주전에 참여했거나 참여 중인 나라들을 중심으로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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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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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처리’ 원하는 사우디…미 의원들 ‘원전 수주 중단해야”
우선 원전 2기를 건설하려는 사우디아라비아입니다. 사우디가 협상 상대국에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기술도 요구하고 있다는 점, 이 때문에 한국의 독자 수주는 어렵고 미국과 컨소시엄 구성을 논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업계에 일찌감치 알려진 내용입니다. 지난 7월 한국, 미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가 예비사업자로 선정됐지만, 처음부터 미국이 월등히 유리한 조건이었던 것이죠. 사우디가 재처리 기술을 가지려면 동맹국이자 ‘경찰국가’를 자임하는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맺어야 합니다. 미국 내 여론은 좋지 않습니다. 지난 3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미국 <시비에스>(CBS) 인터뷰에서 “(적대 관계인) 이란이 핵무기를 만든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도 최대한 빨리 뒤따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최근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의 배후로도 지목됐지요. 마르코 루비오 등 미 공화당 상원의원 5명은 지난 10월31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우디 의사결정권자들을 신뢰할 수 없다’며 원전 수출 논의 중단을 촉구 서한을 보냈습니다. 민주당 하원의원들도 ‘사우디 핵무기 반대 법안’ 발의를 준비 중입니다.
사우디가 ‘원전 건설 사업에 미국 기술을 원한다. 미국이 지원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방향을 틀 것’이란 입장을 지난달 20일 <로이터>를 통해 밝힌 것도 이런 배경에서입니다. 반대 여론이 높아지는 미국을 채근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도 몇몇 언론은 해당 <로이터> 기사를 인용하며 탈원전 때문에 한국이 수주전에서 밀리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습니다.
다음은 지난달 28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세일즈’에 나섰던 체코입니다. 사실 체코 원전 사업은 설익은 상태입니다. 원전 6기(발전량 38%)가 있는 체코는 지난 2015년 신규원전 3기를 짓겠다고 발표했지만, 지금까지 재원 조달 방법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문 대통령이 만난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는 정부가 70% 지분을 보유한 전력공사(CEZ)가 주도해 재원을 조달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반면 체코전력공사, 특히 30%의 소수 주주는 ‘정부 지원이 없으면 신규 프로젝트에 투자해선 안 된다’고 맞서왔습니다.
체코 정부는 원래 올해 말까지 재원조달 모델을 결정하고 내년엔 국제 입찰을 진행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논의가 길어지자, 바비시 총리는 지난 10월30일 가동 중인 “두코바니 원전 수명을 10년 연장해 드는 추가 비용은 200억크라운(약 1조원)인데, 신규원전 건설은 2000억크라운(약1 0조원)이니 신중해야 한다. 재원조달 방안 결정을 연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오랜 기간 신규원전의 필요성을 주장해 온 밀로시 제만 대통령은 바비시 총리를 공개 비난했고요.
영국은 6개 신규원전 사업을 추진 중이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애를 먹고 있습니다. 월파·올드버리 지역 원전 프로젝트에 진출한 일본 히타치는 2012년부터 7년째 협상 중입니다. 프랑스 전력공사(EDF)와 중국 광핵그룹(CGN)이 추진 중인 힝클리포인트 신규원전 2기 건설비용(추정)은 5년 사이에 6.7조원이나 늘어났습니다.
한국전력이 영국 정부와 수익 조건을 두고 협상 중인 무어사이드 프로젝트는, 일본 도시바와 프랑스 엔지가 2014년 합작사 ‘뉴젠’을 만들어 추진하다가 포기한 사업입니다. 엔지는 지난달 8일 매수청구권을 행사해 도시바에 지분을 넘기고 철수했고, 경영난에 시달리던 도시바는 뉴젠 인수 대상자를 찾다가 지난달 8일엔 청산을 결정했습니다.
아랍에미리트(UAE)는 어떨까요. 지난 2009년 이명박 정부가 건설 수주 성과를 낸 뒤, 박근혜 정부는 추가 협상을 진행해 2016년 투자·운영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60년간 지분투자를 하고, 10년간 원전 운전 인력 파견 등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투자·운영 사업 조건은 양쪽의 협상 기간 동안 계속 한국 쪽에 나빠졌습니다. 2011년 한전은 이사회에 16%의 수익률을 기대한다고 보고했지만, 결국 10.5%에 합의했습니다. 협상 초기엔 법률 분쟁 시 런던법원의 중재를 받기로 했는데, 결국은 아부다비 법원 중재에 합의했습니다. 올해 초엔 이명박 정부가 원전 수주를 앞두고 ‘유사시 한국군 자동개입’을 담은 군사 양해각서(MOU)를 아랍에미리트와 체결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었죠. (▶ 관련 기사 :
UAE 원전 계약성과 치장하더니 ‘독소조항’ 떠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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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비용이 불어나며 건설이 중단된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브이씨 써머 2·3호기 2013년 공사 현장 모습.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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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짜리 에너지전환 무서워 ‘구조조정’ 중인 곳으로 간다?
최근 아랍에미리트가 원전 장기정비계약(LTMA)을 내년 초 경쟁입찰에 부친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또다시 ‘탈원전 때문’이라는 논란에 불이 붙었습니다. ‘탈원전을 추진하며 원전 세일즈를 하는 것은 코미디’란 주장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경쟁국의 원전 산업이 성장하고 있거나 최소한 한국보다 느리게 에너지전환이 추진돼야 합니다. 현실은 어떨까요. ‘60년짜리 에너지전환’ 정책은 수주전에서 큰 약점일까요?
프랑스의 경우 2011년 기준 전 세계 원전 4기 가운데 1기를 건설하던 ‘매머드’급 원전 설비 업체 아레바가 2016년 구조조정을 겪었습니다. 핀란드 원전 건설이 9년이나 지연되며 2014년 기준 6조원 규모의 손실을 본 데 따른 것입니다. 6천명을 해고하고, 원전 사업 부문은 프랑스전력공사에 매각했으며, 올해 초엔 기업명을 ‘오라노’로 바꿨습니다. 오라노는 원자로 해체 부문에만 집중하겠다는 방침입니다.
게다가 에너지전환도 계속 추진 중입니다. 지난달 27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원전 의존도 감축(75%→50%) 목표 시점을 기존 2025년에서 최대 2035년으로 미루겠다고 ‘일보 후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17년 안에, 운영 중인 원전 58기 가운데 35기 이상을 폐쇄해야 합니다. 에너지시장 구조 변화로 수익성이 악화해 온 프랑스전력공사를 상대로는 정치권과 금융시장에서 구조조정 가능성이 계속 거론됩니다.
미국은 1979년 쓰리마일 원전사고 뒤 신규원전 건설을 안 했습니다. 그러다 2012년 4기 건설을 재개했는데 건설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결국 빚만 잔뜩 떠안게 됐습니다. 지난달 1일 미국 의회에서 브이씨 써머(V.C. Summer) 원전 건설 사업 실패 청문회가 열린 것은 상징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청문회에서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전력회사가 사업 실패로 지게 된 5조6천억원 규모의 부채를 전력 소비자에게 전가하도록 놔둘 것인지를 놓고 논의가 진행됐습니다. 한국의 60년짜리 에너지전환 정책이 무서워서 원전 기업들이 구조조정 중인 이런 나라들에 눈을 돌릴까요? 원전 수출은 기술력보다 경제성, 경제성보다 외교·정치가 더 큰 변수로 작용하는데도 말입니다.
조금만 휘청해도 ‘탈원전 때문’ 비난부터 쏟아지는 것은, 한국의 협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웨스팅하우스, 아레바, 도시바처럼 되지 않도록 조건을 꼼꼼히 따져야 한다는 주장도 설 자리를 잃습니다. 자칫 중동 핵확산에 한국이 기여하는 꼴이 돼서는 안 된다는 우려는 찾기도 어렵습니다. 아랍에미리트에 원전 수출 성과를 내려다 과도한 군사협정 부담을 뒤집어썼다는 비판도 사라졌습니다. 원전업계는 머지않은 미래에 일감이 사라질까봐 불안하겠지만, 그래도 더 침착하게, ‘뒤탈’ 없을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최하얀 기자
ch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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