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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텔레비전을 볼 때 화면 구석에 수화통역사가 나와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수화로 통역을 해주는 것이 이젠 그리 낯설지가 않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영상 편집에서는 화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따르기도 한다.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 사이의 원활한 소통에는 이렇게 사회적 투자가 따라야 한다. 그러나 장애인 집단과 비장애인 집단 사이의 소통이 정말 별일 없이 순탄하게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되돌아보면 더욱더 중요한 한 부분이 빠져 있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다. 수화로 통역을 하거나 점자로 번역을 한다는 것은 거의 예외 없이 ‘비장애인들의 말’을 장애인들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장애인들의 말을 비장애인들에게 전달하는 통역과 번역의 창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장애인들이 수화로 표현을 하고 그것을 비장애인들에게 통역해주는 방송은 매우 짧은 인터뷰를 제외하고는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들이 비장애인들에게 그렇게도 하고 싶은 말이 없을까? 무언가 할 말은 많은데 표현을 억압받고 있지는 않은가? 점자로 글을 번역하는 것을 점역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의 모든 점역은 비장애인들의 글을 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한 것이다. 장애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점자로 적고 그것을 비장애인들에게 번역해주는 것을 아직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소통이라는 것은 양측의 의견이나 감성을 서로 교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늘 한쪽은 무언가 말하고 다른 쪽은 듣기만 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인들을 더욱더 이해하고 공감하라고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우리 비장애인들이 도대체 무엇을 제대로 이해하겠는가? 하루속히 이러한 비대칭적인 소통 관계를 끊어내야 한다. 이것 역시 대담한 사회적 투자가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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