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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4 17:30 수정 : 2006.01.17 04:29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유서깊은 도시다.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기 위해 만든 누각인 종루의 야경이 화려하다. 종루 아래에서는 거리 음악회도 열려 밤늦도록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3> 동서문명의 접합지 시안

베이징을 떠나 시안으로 순항하던 비행기 안에서 착륙 20여분을 앞두고 기내방송이 울려나왔다. 갑작스런 소나기 때문에 쩡저우로 회항한다는 것이다. 기내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가끔 당해본 사람들은 그런대로 느긋하지만, 초행자들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쩡저우 공항에 착륙하자 뒷좌석에 앉은 60대 라틴아메리카 승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박수를 치자 다들 따라 박수를 쳤다. 사실 1950~60년대엔 비행기가 안착만 하면 승무원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게 상례였다. 예정보다 3시간 늦게 시안에 도착했다.

어둠이 깔린 공항을 빠져나와 얼마쯤 달리자 용광로에서 뽑아낸 쇳물처럼 몇 줄기 불빛이 어디론가 아득히 뻗어간다. 중국이 야심차게 추진중인 이른바 ‘서북 대개발’의 첫 역사로 건설한 시 외곽 순환도로와 하서회랑 쪽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가로등이라고 한다. 시안을 기점으로 한 ‘서북 대개발’의 일환으로 닦은 저 고속도로는 어쩌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실크로드 재발견’일 수 있다. 시안은 일찍부터 동서문명의 접합지로서 오아시스 육로가 동서로 뻗어간 기점이었고, 오늘날 그 삭막했던 길 위에 화려한 고속도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시안의 고속도로는 21세기 우리의 ‘실크로드 재발견’일 수 있다

관중평야 한복판에 자리잡은 시안의 역사는 신석기시대 반파(半坡) 마을에서 시작된다.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2세기께 서주 왕조는 서북쪽 근교인 주원(周原)에 도읍을 정했다가 서남쪽 호경(鎬京)으로 옮겼다. 전국시대 말엽 진나라가 근교 함양을 수도 삼았다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부호 12만을 이주시켜 저 유명한 아방궁을 짓는 등 거대 도성으로 축성했다. 그러다 한나라 때에 와서 지금 시안에 도읍을 정하고 이름도 ‘자손들이 영원히 평안하기를 바란다'(欲其子孫長安)는 소망을 담아 ‘장안’이라고 지었다. 장안이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수·당 때부터다. 수 문제는 전대 왕조인 북주의 흔적을 씻어버린답시고 옛 수도는 몽땅 쓸어버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 크게 흥할 것이란 뜻에서 ‘대흥성'(大興城)을 새로 지었다. 그런데 성을 지은 사람은 서역 출신의 우문개(宇門愷)여서, 오늘날 장안성에는 어딘가 모르게 서역적 요소가 섞여 있다. 수나라를 계승한 당나라는 이름만 장안성으로 고치고 계속 증수·확대해 크기나 아름다움 면에서 단연 굴지의 세계도시를 만들었다.

1100년간 11개 왕조 도읍에서 상공업 도시로

8세기 당나라 최성기 때, 장안은 길이 37㎞의 성곽에 84㎢의 면적을 지닌 거대 도시로서 인구는 무려 100만에 이르렀다. 너비 150~170m에 이르는 도로가 동서남북으로 뻗었고, 시가지는 바둑판 같은 110개의 방(坊)으로 구획되었다. 시가지는 황궁에 이르는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구와 서구로 양분되었다. 거기에 각각 동시와 서시라는 시장이 섰는데, 시장마다 ‘진기한 천하 보물이 다 모인다’는 200여 점포가 모여 있었다. ‘밤낮 시끄럽고 등불이 꺼질 줄 모르는’ 야시장도 즐비했다. 특히 서시는 오아시스로를 통해 들어온 서역 상인들로 밤낮없이 붐빌 뿐 아니라, 서역의 노래와 춤, 옷과 먹거리가 판을 쳤다. 이를테면 호풍(胡風) 일색이었다. 여기에 더해 가로수와 대나무 숲이 우거지고, 곡강지(曲江池)나 화청궁 같은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경관들이 장안을 더더욱 돋보이게 했다.

‘천하보물’ 넘치던 천년왕도 영광 다시 꽃피는듯-실크로드의 재발견



대도 장안의 영화는 현종 때 안녹산의 난과 당말 농민전쟁 등으로 빛이 바래 더는 도읍 구실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영광의 자취가 하루아침에 사그라진 것은 아니어서 14세기 초 이곳을 찾은 마르코 폴로의 눈에는 여전히 ‘지극히 장엄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비쳤던 것이다. 오늘날 시안성은 14세기 말 명나라 때 수축한 것이며, 이때 이름도 ‘시안’으로 바뀌었다. 세계사에서 유례없이 1100여년 동안 11개 왕조의 도읍지로 자리를 굳혀온 고도 시안은 지금 인구 660만을 헤아리는 산시성 성도이자, 서북지방의 최대 상공업 도시로 새 번영기를 맞고 있는 성싶다.

고대 기독교의 한반도 전파 알려주는 비석도

흔히들 시안(장안)을 실크로드 동쪽 끝, 혹은 출발지로 알고 있다. 조선족 안내원은 그 증거물이 있다면서 우리를 옛 서시터로 안내했다. 복잡한 길 한가운데 자그마한 거리공원 비슷한 곳에 나지막한 개원문(開遠門)이 세워져 있다. 개원문이란 ‘먼 길 떠나는 시작을 알리는 문’이란 뜻이다. 문에 들어서면 낙타 등에 짐을 가득 싣고 서쪽으로 길 떠나는 대상을 형상화한 ‘실크로드 기점 군상’이란 석조물이 나타난다. 고행길이지만 7월의 석양볕에는 생기가 감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듣거나, 조형물만 보면 영낙없이 시안을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착각하게 된다. 시안은 동서문명의 접합지라는 입지조건 외에, 실크로드 개척과 얽힌 숱한 연고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이슬람교 사원인 시안 칭전대사 옆 시장에서 이슬람 복장의 여주인이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기원전 한나라 무제는 숙적 흉노를 동서에서 협공하려고 멀리 서쪽으로 장건을 파견한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까지 쫓겨간 월지와 동맹을 맺고자 한 것이다. 그가 오간 길은 오아시스 육로의 남·북도다. 장장 13년이 걸린 장건의 1차 서역사행을 역사에서는 ‘서역착공'(西域鑿空), 즉 서역길의 개척으로 본다. 사실 이 서역착공을 계기로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한 오아시스 육로가 사상 처음 뚫렸으며, 그 시발점은 수도 장안이었다. 그래서 당대까지 개척된 오아시스로의 남·중·북도의 기점도 모두 장안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와 더불어 동서문명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여러 유물들은 요로에 자리잡은 시안의 위상을 더욱 드높였다. 중국 최대의 ‘석조문고’라는 비림(碑林)은 말 그대로 비석으로 숲을 이룬 박물관인데, 여기에 역대 명필들의 글을 새긴 석비 1095기가 소장되어 있다. 그 중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2호실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다. 781년 세운 이 비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유물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전파상을 알려주는 보물이다.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됐다는 돌십자가와 발해 유적에서 나온 협시보살의 십자가상 등 국내 고대 기독교 관련 유물은 경교의 동방 전파와 관련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동전사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 여사는 1917년 이 비의 모조품을 금강산 장안사 경내에 세우기도 했다.

진시황릉∼병마용 세계 최대 박물관 설계

비의 의장이나 내용에서 주목되는 것은 동서문명간 융합의 흔적들이다. 의장에서 보면, 비는 상부와 비신, 좌대로 구성된다. 상부는 용이 큰 여의주를 받쳐들고, 그 바로 밑에 십자가가 연꽃과 뜬구름 속에 새겨져 있다. 이것은 기독교(십자가)와 더불어 불교(여의주)와 도교(뜬구름)의 요소가 섞였음을 말해준다. 내용 면에서도 다른 종교와의 융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적지 않은 교리적 개념들이나 용어들을 불교나 유교, 도교에서 빌려다 쓰고 있다. 예컨대, 하느님을 건(乾), 종교를 법, 주교를 법주, 구원을 제도, 사원을 법당이라고 칭하는 식이다. 또 박물관 5호실에는 최근 시안 역 공사 때 발굴된 보살상 한 점도 전시중인데, 목걸이·복식 등으로 미루어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초기 간다라상임이 틀림없다.

시안 시내 개원문 안에 있는 석조물 ‘실크로드기점군상’에서 동네 아이가 올라가 놀고 있다.
서방 종교의 동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슬람교다. 그래서 땅거미 질 무렵이지만 시안 칭전대사(淸眞大寺)를 찾았다. 8세기 중엽 세워진 이 사원은 이슬람 사원이라면 으레 있어야 할 ‘미어자나’(예배 시간을 알리는 첨탑)나 반구형 돔이 따로 없는 중국 전통식 건물이다. 저녁 예배 시간이 되자 신도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데, 15년 전에 비해 젊은이들이 더러 끼여있는 것이 달라진 모습이다.

시안은 동서문물 집산지이고 교역장일 뿐만 아니라, 동서양인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가장 번성했던 당대에 동서양 각지를 드나든 사신이나 상인, 승려, 유학생, 연예인 등 이른바 ‘교류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눌러앉은 외방인들도 부지기수였다. 안녹산을 비롯한 번장들이나, 시선 이백, 양귀비 같은 위인들도 서역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시안은 동서문명을 한곳에 아우른 거대한 박물관이다. 중국 당국은 지금 교외의 진시황릉과 거기서 1500m 떨어진 병마용 박물관까지 합쳐 외성이 6.2㎞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박물관을 세울 계획을 짜고 있다고 한다. 모양새를 어떻게 갖추든, 분명한 것은 시안이 오아시스로의 중요 길목에 자리잡은 동서문명 접합지일 뿐, 결코 길의 동쪽 끝이거나 출발지는 아니란 점이다. 이를 반영하듯, ‘파수절류'( 水折柳)와 ‘위수절류'(渭水折柳)란 말이 전해온다. 동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파수 가에서, 서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위수 가에서 버드나무를 꺾어 둥근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고사다. 고리를 뜻하는 한자 환(環)은 ‘돌아오다’는 뜻의 환(還) 자와 발음이 같으므로 빨리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은 작별인사가 된다. 이처럼 시안은 길의 끄트머리가 아니라, 길손들이 동서로 떠나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다. 시안이 한반도를 포함한 그 이동의 여러 지역, 나라들과 오아시스로를 통해 교류를 지속했음을 감안하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해진다. 통념은 자칫 눈을 멀게 하는 법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7∼9세기 풍미한 ‘호풍’ 지금도 밤시장 밝혀

서안과 서역문화

당나라 때 장안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서역 예술인들의 조상. 비파 뜯고 피리 부는 악사들과 곡예사가 낙타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어디서 그대와 이별할까/ 장안의 동쪽 문인 청기문이네/ 술집의 호희(서역의 무용수)는 하얀 손 내밀어/ 손님을 잡아끌고 금준(야광술잔)으로 취하게 만드네’

당나라의 대시인 이백은 ‘송배십팔도남귀숭산’이란 한시에서 장안을 휩쓸었던 당시 서역문화 열풍을 이렇게 빗대었다. 〈신당서〉 〈구당서〉 등의 중국 역사책을 보면 7~9세기의 장안 시내는 어디서든 쿠처·투루판, 소그디아나, 이란 등의 중앙·서아시아에서 온 호인(胡人)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실크로드 교역을 주도한 소그드 상인들은 악기, 약품, 향료, 융단 등의 희귀품을 낙타 행렬에 싣고 들어와 서시에서 장사를 했고, 만명에 육박하는 이란, 투르크 사람들은 도심 곳곳에 집단촌을 이뤄 살았다. 이들이 가져온 서역의 이국적이고 세련된 의식주 문화는 왕실 귀족과 재산가들의 넋을 빼앗아 이른바 ‘호풍'(胡風)이라는 실크로드 문화를 100년 가까이 유행시켰다.

복식제도를 다룬 〈당서〉의 ‘여복지’를 보면 개원 연간인 8세기 초 이후 서역인들의 호모(모자), 호복(옷), 호극(신) 등이 유행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잘나가는 귀족 젊은이들은 서역풍 모자와 옷을 입고서 온종일 성안팎을 거닐다 서역 무희가 기다리는 술집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일과였다고 전해진다. 유병, 호병, 탑납 따위의 이란풍 음식류와 ‘호주’로 불리는 투르판산 서역 포도주, 회오리춤으로 극찬받은 호선무와 쿠처악 따위 서역칠조 등이 도성 안에 널리 퍼졌다. 9세기 이후 황소 등 빈번한 수도 침탈로 장안의 서역문화는 스러져 갔다. 하지만 그 흔적은 오늘날도 남아 칭전대사 주위에는 중국 신장 출신의 무슬림 이주민들이 차린 휘황찬란한 바자르(밤시장)가 성업중이다.

노형석 기자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취재 임종업 blitz@hani.co.kr,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김경호 jijae@hani.co.kr,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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