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7일 베이징 서북쪽 팔달령(바다링)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리장성을 걸어 오르고 있다. 날씨가 좋지 않아 멀리 산 정상은 보이질 않았으나, 일요일이라 평소보다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왔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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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2> 실크로드의 꿈을 키워준 베이징
꼭 10년만의 해외나들이다. 마냥 축하라도 하듯, 가랑비 내리는 가운데 이륙한 비행기는 곧장 기수를 서북쪽으로 돌린 뒤 황해 창공을 가로지르며 베이징을 향한다. 며칠 간 밀렸던 피로감이 몰려와 온몸이 호졸곤해진다. 눈을 감았으나 졸음 대신 그 시절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베이징, 그곳은 지금 찾아가는 실크로드의 꿈을 키워준 고장이다. 50여 년 전 그 곳에서의 대학시절, 20세기 초 영국 탐험가 스타인이 남긴 내륙아시아 탐험기를 읽은 것이 그 길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실크로드는 그저 모험과 신비의 길로 젊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문명교류에 눈 뜨기 시작하면서 그 길은 문명을 소통시키는 창조와 지혜의 길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남해의 뱃길로 유학 길에 올랐고, 50년대 중국 외교부 근무시절 공무로 신장까지의 오아시스 육로와 모스크바까지의 시베리아 초원로를 몇 차례 오가다보니 실크로드의 꿈은 자꾸만 부풀어갔다. 베이징은 기원전부터 육로를 한반도에 이어주는 고리였다 베이징은 삼각형 모양인 화베이 평야의 정점에 있다. 역사적으로 2000여 년 전부터 중국 동북부 국경지대의 중요한 군사·교역 중심지이자 오아시스 육로의 요지였다. 북은 몽골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들, 동쪽은 한반도, 서쪽은 중앙아시아, 남쪽은 중원의 여러 지방들을 연결하는 십자로 구실을 해왔다. 특히 13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700여 년 동안 여러 제국의 수도가 되어 동서문명의 융합도시로도 발달해 왔다. 13세기 중엽 몽골제국이 ‘대도(大都)’란 이름의 수도를 건설할 때는 아랍인이 도시설계를 총지휘하도록 하여 내성의 4각형 성벽과 12개 문은 중국 전통 양식을 쓰고, 실내와 주거공간은 몽골· 중앙아시아 양식대로 지었다. 명대 이후엔 서구인들이 들어와 장춘원(長春園) 같은 바로크식 궁정 건축물들을 다수 남겨놓았다. 베이징은 일찍부터 오아시스 육로를 한반도에 이어주는 고리 구실도 해왔다. 기원전 전국시대 베이징 근방의 ‘계’란 곳에 도읍한 연나라는 그 길의 동쪽 끝에 해당하는 ‘명도전로(明刀錢路)’를 통해 한반도와 교역했다. 연나라 화폐 명도전이 계로부터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는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었는데, 명도전로는 그 출토지들을 연결한 최초의 한·중 육로가 된다. 신라시대에는 경주에서 출발한 오아시스 육로가 한주(서울)와 평양을 거쳐 유주(幽州:당나라 때 베이징 이름)에 이르러 낙양으로 남하한 뒤 서행해 장안을 지나갔다. 여러 연행록에서 보다시피, 고려·조선시대에도 수많은 사신, 학자들이 그 길을 따라 베이징에 드나들면서 중국과의 교류는 물론, 전래된 서양문물까지 받아들였다. 선조들이 발이 닳도록 오간 그 길을 지금은 분단 장벽에 가로막혀 가지 못한다. 길 아닌 길을 에돌아 가는 셈이니 무슨 옛길 답사냐 싶다.
조선시대의 연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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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희읍스름한 대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들 중국이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10년 전 그 모습과는 어떻게 다를까. 더욱이 50년 전 그 시절 우리가 바라고 그리던 그 모습과는…. 종잡을 수 없는 상념과 의문들이 비행기가 내려앉을 때까지 꼬리를 문다. 50년대 대학시절 탐험기에 사로잡혀 첫 답사지는 교통이 사통팔달했다는 데서 유래한 베이징 서북쪽 빠다링(八達嶺)의 만리장성이다. 달에서 보이는 지구상의 유일한 인공건조물이라는 장성은 600년 전 명나라 때 쌓았다. 포장 도로를 45분쯤 달려 장성 언저리에 도착했다. 빠다링 중턱에 수북히 우거진 숲을 바라보니 모래바람 맞으며 부근에 묘목을 심던 추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그 숲이 무색하게 사막이 족히 100미터는 내려앉아 길 양 쪽에 방사림대를 겹겹이 늘어 놓았다. 성문 어귀부터 사람들로 붐빈다. 정작 장성에 오르니 발 디딜 틈이 없다. 그날따라 짙은 안개가 낮게 깔려 30미터 안팎도 분간하기 힘들다. 결국 몇십 미터밖에 안되는 정상 망루에 오르는 일은 포기하고 말았다. 현장 해설원 말을 들으니, 이날을 포함해 평시 약 4만명이, 명절 때는 10여 만명이 찾아온다고 한다. 이를테면 ‘장성붐’이 일고 있는 셈이다. 15년 전 이맘때 찾아왔을 적과는 너무나 판이한 광경이다. 연나라 화폐 명도전 요동 거쳐 우리땅에 지금 중국은 왜 장성인가 ? 장성 들머리 왼쪽 벽에는 ‘불도장성비호한(不到長城非好漢)’, 즉 “장성에 와보지 않은 자, 사내 대장부가 아니다”란 뜻의 대문짝 만한 글씨판이 붙어있다. 어떤 이는 이 말을 중국 속담으로 아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고 정치가 마오쩌둥의 ‘어록’이다. 일꾼들이 성벽을 쌓다가 죽으면 그 자리에 묻혔으므로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장성은 그 옛적엔 어마어마한 존재였겠지만, 지금은 한낱 유물로 남아있을 뿐이다. 별로 높지 않고 가파르지도 않아 오르기 어렵지않고, 또 현대 교통수단으로는 와보기에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이 ’장성에 와보는 것‘을 강조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비상을 꿈꾸는 이 시대 중국인에게 장성이 안겨주는 호기(豪氣)와 자부의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관람객들이 즐겨 사입는 티셔츠에는 “나는 장성에 올랐다”라는 호방한 글자가 찍혀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그런 호기와 자부 때문에 지금 중국은 장성이 필요하고, 사람들은 그 체험 때문에 찾아오는 셈이다. 장성에서 받은 충격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내 텐안먼 광장 옆의 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진귀품전시회’를 돌아봤으나 교류 관련유물은 별로 없었다. 대충 둘러보고 나오는데, 마침 정화(鄭和)의 출항 6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회가 눈에 번쩍 띄었다. 실크로드에 관한 얘기치고는 더 없는 호재다. 97년 미국 <라이프>지는 지난 1000년을 만든 세계인 100명을 순위별로 골랐는데, 11명밖에 안되는 동양인 가운데 내로라하는 위인들을 다 젖히고 단연 앞 순위(14위)에 오른 사람은 뜻밖에도 정화였다. 7차에 걸친 그의 ‘하서양(下西洋)’, 즉 서양으로 가는 항해가 선정이유였다.
류리창은 중국 베이징시에 있는 문화의 거리로 우리나라로 하면 인사동과 같은 거리다. 아편전쟁이 일어난 뒤 이곳의 도서와 골동품은 제국주의의 약탈 대상이 되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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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1억5천만명 “나는 장성에 올랐다” 그는 28년 간(1405~1433) 약 19만㎞의 바닷길을 누비면서 30여 개 나라를 찾아갔다. 실크로드 해로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장거다. 그의 ‘하서양’은 15세기 말 이른바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콜럼버스나 ‘인도항로’를 개척했다는 바스코다가마보다 시간적으로 약 90년 앞설 뿐 아니라, 선단 규모나 선박의 구조면에서도 월등하다. 정화의 보선이 길이가 138m인데, 다 가마의 기함은 2에 불과하고, 그 적재량은 1,500톤 대 120톤이며, 승선인원의 경우는 2만7000명 대 160명이니, 실로 비교가 안된다. 정화 선단이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이르렀다는 설도 있다. 7월 11일은 정화가 첫 배를 띄운 지 6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중국 정부는 이날을 공식 기념일로 정하고 거국적인 기념행사를 치렀다. 그 행사의 하나로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전시장에는 보선 모형과 배의 잔해를 비롯한 유물 190여 점이 선보이는 중이었다. 왜 이 시점에 정화가 뜨는 걸까? 그것은 ‘세계무대에서 국력을 과시하고 있는 중국 외교노선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하서양’의 목적 중 하나가 이민족(몽골)의 압제 아래 추락한 중화제국의 명예를 되돌리고 국위를 과시하려는 것이었으니, 현 중국 외교노선과 그 속내는 피장파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귀감으로 600년 전의 정화가 필요한 것이다.
중국 베이징시 역사박물관에서 정화의 출항 600돌을 맞아 ‘정화 특별전시회’가 열려 관람객들이 전시된 배를 관람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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