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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9.14 21:08 수정 : 2006.09.14 21:08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8> 40일간의 대장정을 마치며

이스탄불에서 마지막 답사 일정을 마치고 마르마라해의 수면에 부챗살 낙조가 비낄 무렵 아타투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타고 갈 두바이행 비행기는 ‘기계 사정’으로 예정보다 4시간 25분이나 지연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2시간 여유를 두고 두바이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갈아탈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먼 길 떠난 나그네에게 돌아가는 길은 한시바쁜 일이지만, 어찌하랴. 자정에 뜬 비행기는 3시간 30분쯤 날아 두바이 공항에 안착했다. 새벽녘인데도 30도를 웃돈다. 항공사가 내준 공항 호텔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8월 25일) 새벽 서울로 향했다.

꼭 40일 만의 귀향이다. 하루 푹 쉰 덕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으니 답사 과정에서 보고 듣고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가면서 그 모든 것을 한 줄로 얽은 답사 길이 마냥 꿰미처럼 캄캄칠야의 거죽에 드러난다. 그 길이 바로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이 서울에서 이스탄불까지 밟고 지나간 오아시스 육로 수만리 길이다.

한반도~로마 ‘오아시스 육로’ 확인
경주에서 베이징 거쳐 시안서 만나
3만7천리, 하루 100리씩 걸어 1년 거리
낙타 대신 비행기 뜨는 ‘신오아시스로’
그 길 따라 ‘세계 속 한국’도 보았다

실크로드 3대 간선의 하나인 오아시스 육로(오아시스로)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북위 40도 부근 건조 지대에 흩어진 오아시스들을 잇는 문명 교류의 통로를 말한다. 이 길은 다른 간선인 초원로, 해로와 달리 시종 큰 변동 없이 줄곧 이용됐을 뿐 아니라, 연도의 포괄 범위도 더 넓으며, 그 연변에서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한마디로, 오아시스로는 동서교통로의 중추 구실을 해왔다. 그래서 오늘날도 실크로드 하면 흔히 이 육로를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아시스로 변천사를 돌아보면, 처음부터 극동에서 로마까지 가는 길이 일시에 개통된 것은 아니다. 원래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고원을 사이에 두고 동서 각지엔 짤막짤막한 길들이 단절적으로 널려 있었다. 이 길들이 파미르 횡단로가 뚫리면서부터 이어져 비로소 동서 오아시스들을 관통하는 완결된 길이 되었던 것이다.

파미르고원 뚫리며 비로소 동서연결

파미르 서쪽의 서아시아에는 기원전 6세기께 이미 정비된 교통로가 줄줄이 뻗어 있었다.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년 재위) 때 인도 서북부 간다라부터 이집트 지역까지 정연한 교통망이 사통팔달해 영내 23개 주와의 연계가 원활했다. 그 바탕에서 오아시스로의 발단이라 할 수 있는 수도 수사부터 아나톨리아 사르디스에 이르는 이른바 ‘왕의 길’이 개통되었다. 곳곳에 숙소 등이 두루 갖춰진 약 2475㎞의 이 길을 준마 탄 전령사는 열흘 걸려 주파하곤 했다. 지금도 이 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파미르 동쪽 지역 교통은 전한 때인 기원전 139~126년 장건이 13년간 서역 사행을 다녀온 뒤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옛 기록을 보면, 전한시대에는 크게 남도와 북도가 있었는데, 모두 시안(장안)을 기점 삼아 하서회랑으로 서행하며 둔황에 이른다. 여기서 남북도가 갈라진다.

남도는, 둔황 서남쪽 양관에서 누란(선선, 이하 괄호 안은 당시 이름임)을 거쳐 쿤룬산맥 북쪽 기슭을 따라간다. 이어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의 체르첸, 호탄 등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나 피산에서 다시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길은 계속 서행해 파미르고원을 넘고 아프가니스탄(대하, 박트리아)을 지나 이란(안식, 파르티아)에 이르며, 다른 한 길은 서남쪽으로 틀어 카슈미르와 간다라를 거쳐 인도에 닿는다.

반면, 북도는 둔황 서북쪽 옥문관에서 시작해 ‘악마의 늪’이 펼쳐진 고비사막 서단과 투루판(차사전왕정)을 거친 뒤 톈산산맥 남쪽 기슭을 따라간다. 그 다음 타림분지 북방 언저리의 카라샤르(언기), 쿠얼러(위리), 쿠처(구자) 등 오아시스 국가들과 카슈가르(소륵)를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은 뒤 페르가나(대원)에 도착한다. 여기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한 길은 서북쪽으로 사마르칸트(강거)를 지난 뒤 시르다리야강 연안을 따라 아랄해(북해)에 이르며, 다른 길은 서남쪽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란에 도달한다.

이 오아시스로는 1~2세기 후한 때는 3도, 3~6세기 위진남북조 때는 다시 4도로 세분화했다. 하지만 기본노선은 전한 때의 것을 답습했다. 7세기 당대에는 파미르고원 서쪽에 도호부 22개를 두어 서역 경영을 본격화하면서, 서역의 지역 개념도 인도와 이란, 아랍, 로마까지 확대되고, 오아시스로의 동서 두 끝도 그만큼 멀리 옮겨간다. 이때부터 여러 갈래 육로는 크게 남북 양도로 합쳐져 오늘에 이른다.

남도는 뤄양이나 시안에서 시발해 안시, 둔황을 거친 뒤 전한시대의 남도대로 인더스강 상류에 이른다. 다시 서쪽으로 카불, 칸다하르, 이란 루트 사막 언저리 케르만을 거쳐 바그다드와 팔미라(시리아), 지중해 동안에 도착한다. 북도도 뤄양, 시안에서 시작해 안시에서 남도와 갈라진 뒤 전한 시대 북도대로 카슈가르를 지난다. 그 뒤 톈산산맥의 남쪽 기슭을 따라 서행해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메르브와 이란 니샤푸르, 테헤란(라가에)을 지난 뒤 서북쪽의 아나톨리아 고원을 지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이른다. 여기서 계속 서북 방향으로 가면 발칸 반도 서변을 거쳐 로마에 종착하게 된다.

이처럼 오아시스로는 로마에서 시안까지라는 게 지금까지 통설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다시피, 이 길을 통한 동서문명 교류는 시안에서 멎지 않고 계속 동진해 한반도까지 이어졌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여러 서역 유물들은 이런 사실을 입증한다. 따라서 오아시스로를 한반도까지 연장하는 것은 역사의 당위적 복원이다. 이 연장의 요체는 시안부터 한반도까지 육로 노정을 밝혀내는 것이다. 문헌기록이나 출토 유물에 근거해 노정을 추적하면 다음과 같다.

즉 한반도의 남단(경주)에서 출발해 서울(한주)과 평양을 지나 강계(동황성)에서 압록강을 건넌 뒤 선양(심주), 요중(광주)을 거쳐 고대 한-중 접경지인 초양(영주)에서 중국 땅에 접어든다. 6세기께 초양은 고구려가 지배한 동북아 최대의 국제 무역도시였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산하이관(임투관)을 넘으면 베이징(유주)이다. 이어 동·중·서로의 세 갈래 길을 따라 남하해 뤄양에 이른 뒤 서진해 시안에 도달하면 서역 오아시스로와 맞닿는다. 그렇게 되면 서쪽 끝을 로마로, 동쪽 끝을 경주로 하는 오아시스로 전 노정이 복원된다. 총연장은 약 1만5천㎞(약 3만7천리)로, 하루 100리씩 걸으면 주파에만 1년이 걸린다.

초원로·해로도 재발견하게 되길

이상은 기원전 6세기께부터 중세까지 2천여년 동안 전개된 오아시스로다. 이 시기 길은 낙타·말 같은 가축 중심 교통수단이나 인간 보행에 의해 소통되고 운영되었고, 그 길 위에서 고대, 중세의 숱한 문명이 명멸을 거듭했다. 그러나 근세 들어 철도와 비행기, 기선 등 기계동력에 따른 교통수단이 도입됨으로써 오아시스로를 비롯한 실크로드 전반은 운영·기능 면에서 전래 태생적 모습은 차츰 사라지고, 육·해·공에 걸친 입체적 교통망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문명교류의 면모도 크게 달라졌다. 이를테면 교류 통로라는 속성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용과 형태, 수단에서는 획기적 변화가 일었다. 근대를 기점으로 이전의 길은 전통 오아시스로로, 이후의 길은 구별된 ‘신오아시스로’로 정립하는 것이 가당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낙타·말 아닌 자동차와 기차·비행기로 옛 흙길 위에 포장된 새 길을 따라 엄청난 속도와 규모로 오간다. 이른바 ‘철의 실크로드’는 이런 변화에서 나온 ‘신실크로드’(신오아시스로 포함) 개념이다. 수천년 동안 발길을 불허하던 ‘죽음의 바다’ 타클라마칸 사막에 생겨난 ‘사막공로(沙漠公路)’는 다름 아닌 ‘신오아시스로’다. 이 ‘신오아시스로’ 연변에는 우루무치나 아슈하바트, 테헤란이나 앙카라 같은 현대도시가 생겨났고, 숱한 부존자원이 개발되면서 문명과 그 교류는 모습을 일신하고 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잊었던 옛것을 찾고 더 깊이 알아내기도 하지만, 그 못지않게 새것을 발견하고 미래의 꿈에 부풀기도 한다. 그래서 일행의 답사에 ‘실크로드의 재발견’이나 ‘신실크로드’라는 의미를 새삼 부여하게 된다.

답사길에 만났던 실크로드 연변의 숱한 사람들. 생김과 생활방식은 다르지만, 문화를 잇는 교류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소중하다.

사실 이런 의미는 일찍이 이 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포착했다. 1993년 유럽연합은 이른바 ‘유럽-카프카스-아시아 회랑지대 운송(약칭 트라케카) 프로그램’을 공포한 바 있다. 98년엔 흑해 주변국들과 중앙아시아 4개국 등 12개 나라 대표가 바쿠에 모여 ‘아시아의 잃어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는 협약, 즉 동서 자유무역 회랑지대를 설립하려는 협약에 서명했는데, 그 지대를 ‘뉴실크로드’라고 불렀다.

‘한겨레’ 답사단 일행은 서울에서 이스탄불로 이어진 수만리 길을 누비면서 ‘세계 속 한국’이란 위상에 가슴 뿌듯해졌고, 오롯한 동서 문물의 교류 흔적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아울러 인류가 그 연변에서 꽃피운 문명들의 향훈도 즐길 수 있었다. 아쉽게도 전운이 감도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땅은 밟지 못했다. 밟았더라면 필히 반달리즘의 해악을 고발했을 것이다. ‘실크로드의 재발견’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오아시스로 말고도 초원로와 해로가 재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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