넴루트산 서쪽 테라스. 기원전 1세기 콤마게네 왕국의 안티오코스1세가 자신을 위해 지은 ‘히에로테시온’(성스런 안식처). 터키인들이 세계 8대 기적의 하나라고 자부하는 이곳은 해발 2100m에 7의 분묘를 지어, 그 앞에 안티오코스 1세 자신과 신들의 석상을 배치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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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2> 성스러운 안식처, 넴루트산
기원전 1세기 안티오코스 1세 분묘폭파까지 했지만 아직 입구 못찾아
왕과 네 신들 석상 땅위에 나란히
헬레니즘·로마 문화융합 웅변
터키인들이 세계 8대 기적의 하나라고 자부하는 넴루트산의 안티오코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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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에서 30여분간 오솔길을 따라 해발 2150m의 넴루트 산정에 등반했다. 나무 없는 민둥산이다. 사방으로 뻗은 산들과 구릉들을 발밑에 거느린 주봉이다. 여기에 기원전 1세기 콤마게네 왕국(기원전 163~기원후 72)의 안티오코스 1세(기원전 69~31)가 자신을 위해 지은 이른바 ‘히에로테시온’이 있다. 그리스어로 ‘히에로스’는 ‘성스러운’, ‘테시스’는 ‘장소’란 뜻이다. 여기서 ‘장소’란 ‘영원히 휴식하는 곳’, 즉 ‘안식처’를 말한다. 따라서 ‘히에로테시온’은 ‘성스러운 안식처’란 의미의 분묘로 해석할 수 있다. 산상 왕국이던 이곳은 계곡에서 일년 내내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 덕분에 농경이 발달했다. 기원전 1세기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콤마게네의 초기 도읍 사모사타에 관해 ‘좁은 천연요새지만, 놀라울 정도로 기름진 땅’이라고 묘사했다. 안티오코스 1세의 ‘성스러운 안식처’는 그가 묻힌 고분과 3개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넴루트산 높이는 2100m였으나, 꼭대기에 지은 7 높이의 분묘가 50m로 낮아져 지금은 통상 2150m를 헤아린다. 작은 자갈로 지은 고분 지름은 150m로 들어간 자갈의 부피만 약 29만㎥, 무게는 60만톤에 달한다. 동서쪽 테라스는 구조가 대체로 일치하는데, 석회암 석상들과 배후의 사암 구조물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석상들은 안티오코스 1세와 4명의 신상들을 중심으로 좌우에 수호동물인 수리와 사자, 안티오코스 1세와 수호신들의 악수 장면을 새긴 부조물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5대 석상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안티오코스 1세→여신 콤마게네→제우스 오로마스데스→아폴론 미트라스→헤라클레스 아르타게네스 아레스의 순이다. 석상들은 당시 여러 문명의 융합상을 오롯이 보여준다. 콤마게네의 의인상인 여신 콤마게네는 도시나 특정 지역을 여신상으로 인격화하는 헬레니즘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 한가운데 신상 제우스 오로마스데스는 그리스 신화의 천지 주재자 제우스와 조로아스터교의 천지 창조주 오로마스제데스(아후라 마즈다의 그리스어 발음)를 혼합한 신이다. 이 혼합 신상은 무게 5~0.9톤짜리 돌 31개로 만든 105톤짜리 신상으로 가장 크다. 그 오른쪽 아폴론 미트라스 신상에서 아폴로는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이며 미트라스는 조로아스터교의 빛의 정령이니, 역시 융합신이다. 마지막 신상은 그리스 신화에서 불멸의 강자인 헤라클레스와 전쟁신 아레스를 페르시아 군신(軍神)인 아르타게네스와 한데 묶은 것이다. 하지만 천지를 쥐락펴락한다는 신들마저도 지진 위력 앞에 머리가 잘려나가는 수난을 당하고 말았다. 지진으로 석상들 머리 동강나 일부 석상이나 부조물에 새겨진 그리스어 명문들은 이 고분과 콤마게네 왕국 연구에 귀중한 사료를 제공했다. 비문을 보면 매달 16일 왕의 탄생일과 10일 즉위일에 즈음해 경축행사가 치러졌음을 보여준다. 동서쪽 테라스와 달리 북쪽 테라스에는 석상, 비문 등은 없고, 80m짜리 벽과 몇몇 석판 잔해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마 제사 때 집합 장소이거나, 후계자들을 위해 남긴 예비 테라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쪽 테라스 앞에는 사방 13.의 제단도 있다. 아직까지 고분 입구는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고고학자 고에르가 고분 안 묘실을 찾으려고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켰지만 허사였다. 첨단의 지구물리학적 방법으로도 조사한 바 있으나, 결과는 오리무중이다. 넴루트산 유적 발굴은 독일이 시작했다. 일찍이 1835년 독일의 헬무트 모르토케 대위(후에 육군원수가 됨)는 군사 작전에 필요한 이 지대 도로 지도를 작성하면서 초점을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넴루트산에 맞췄다. 그러나 발표한 보고서에는 유물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 뒤 오스만 제국에 고용된 독일인 기사 카를 제스터는 동아나톨리아로부터 중앙아나톨리아를 지나 지중해 항구까지 수송로를 탐색하다 콤마게네에서 아시리아 유물을 발견했다고 1881년 프로이센 제국과학아카데미에 편지로 보고했다. 보고를 접한 고고학자 오토 프슈타인은 곧장 현지에 달려가 제스터와 조사에 착수했다. 이듬해 오스만제국 박물관(현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의 전신) 관장 오스만 함디 베이가 합류한 독일-터키 합동조사단은 넴루트산을 비롯한 부근 유적 조사를 1938년까지 벌여 개략적 면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콤마게네 왕국은 셀레우코스 왕국의 일부로 출범해 로마에 병합될 때까지 헬레니즘, 로마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넴루트산 유적 말고도 카라큐슈 고분, 세레우키아 암굴묘 등 다수의 유적유물들을 남겼다. 아쉽게도 이런 유적들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하산했다. 안티오코스 1세는 죽으면 영혼이 승천하는 것으로 믿고 왕국에서 가장 높은 넴루트산 꼭대기에 안식처를 마련했다. 아마 그는 자신이야말로 하늘과 가장 가까이 있을, 그래서 가장 위대한 영령(英靈)으로 자위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고의 영웅호걸 모두 북망산 황천객 신세를 면치 못했을진대, 그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안식처는 돌무덤으로 남았을 뿐이다. 단, 그 망상에 날개를 단 조형물이나 기록은 당대 특정 역사상을 반영한 유물 대접을 받아 세인의 눈과 귀를 끌고 있는 것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헤라클레스상, 통일신라 사천왕상과 한 뿌리 실크로드 타고 동쪽으로 전파
인도 불교문화와 섞여 한반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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