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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아바드 궁전 박물관 안 백궁 정문 앞의 팔레비 샤의 동상. 이슬람혁명 당시 시위대들이 윗부분을 부숴 장화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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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36> 진통 겪는 테헤란
전통과 현대의 갈등과 조화는 문명사의 순리다. 문제는 어떻게 조화를 이뤄내느냐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실크로드 곳곳을 답사하며 내내 눈여겨보는 부분이다. 근래 이란만큼 전통, 현대의 갈등 속에 몸부림치는 나라도 드물다. 그 중심에 수도 테헤란이 있다. 밤 11시 5분, 이스파한에서 북쪽으로 400km 떨어진 테헤란 행 항공편에 몸을 맡겼다. 밤하늘의 어둠 속에 48년 전과 25년 전 찾았던 테헤란의 엇갈린 모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관행일 뿐 구속력 없었던 여성 히잡 팔레비 땐 벗기고 호메이니는 씌웠듯
근대화-이슬람 ‘미완의 두 혁명’ 충돌 분노 속 이성 되찾아 공존의 길 찾길
지금 테헤란은 어떤 모습일까. 순간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이란의 여성 영문학자인 아자르 나피시는 이슬람 혁명 격동기인 1979~81년 테헤란 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히잡 착용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해직되었다. 그 뒤 젊은 여성 7명과 비밀 독서회를 만들어 <롤리타> 같은 금서들을 읽으면서 현실에 항거하다, 결국 미국에 망명한다. 그가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란 저서에서 밝힌 내용이다. ‘롤리타’란 성적 도착증을 다룬 작가 나보코프의 장편소설<롤리타>(1955)를 말한다.
이슬람 전통성 시비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히잡은 일종의 관행이지, 구속력을 지닌 제도나 규정은 아니다. 무용론이 나오면서 자의에 맡기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폐지한 나라도 있다. 이란은 혁명 전 폐지했으나, 혁명 뒤 서구화(현대화)로 망가진 전통을 되살린다는 명분 아래 다시 착용하도록 했다. 전통을 거부하고 현대를 꿈꾸는 아자르에겐 질곡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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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아바드 궁전 박물관 안 ‘청궁’의 프랑스풍 실내. 최고급 프랑스제 가구, 120수의 카펫 등이 팔레비왕조의 사치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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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체제 같은 정치 구조부터 히잡 같은 일상 생활 구석에까지 전통과 현대 사이의 엇박자가 생겨났다. 저울추가 어느쪽에 기우느냐에 따라 진보와 보수가 갈등하며, 서방과의 갈등도 엉켜 더욱 복잡해진 것이 이란의 현실이 아닌가.
어느새 45분간 비행을 마치고 자정께 호메이니 국제 공항에 안착했다. 공항을 빠져나와 밤길을 약 30분쯤 달렸다. 시 북쪽에 있는, 고도 1500m 언덕 위의 보즈루크 아자디 호텔(대자유 호텔)에 여장을 푼다. 원래 ‘인터콘티넨탈 호텔’이었으나,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다.
테헤란은 5604m의 최고봉 다마반드산을 비롯한 4천m 이상 연봉들을 거느린 엘브루즈 산맥 남쪽 기슭에 있다. 고도가 높을 뿐 아니라, 지형도 대체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경사지면서 경관도 달라진다.
정치구조부터 일상생활까지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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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건국 2500년을 기념해 1971년 팔레비왕조 때 세운 아자디탑(자유의 탑)의 현대식 위용과, 오른쪽 이슬람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의 초상은 테헤란의 오늘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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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로서의 역사는 200여년밖에 안되지만, 거주의 역사는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의 면모는 13세기 전반부터 갖추기 시작했다. 몽골군이 서남쪽 8km 지점의 셀주크 왕조의 도읍 레이를 파괴하자, 복원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나무 숲 무성하고 맑은 강물 흐르는 쾌적한 자연환경에다 과일이 풍족하고 사냥의 적지인 까닭에 16세기 중엽 사파비 왕조의 타흐마스프 1세는 별궁을 짓고 둘레 8km에 달하는 성벽을 쌓았다. 이후 잔드조(1750~1794)를 뒤엎고 북방계 까자르 왕조(1780~1924)가 들어서자 수도를 남부 시라즈에서 인구 1만 5천밖에 안되는 테헤란으로 옮겼다. 인구가 5~6만으로 늘어난 19세기 후반엔 성벽 둘레를 15.5km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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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아바드 궁전 박물관 안 백궁 정문 앞 넓은 정원. 팔레비왕시절 분수대에 잡풀만 무성해 권력무상을 대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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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들어 강대국들의 간섭과 1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입으면서, 테헤란은 현대화에 눈을 떴다. 1925년 팔레비 왕조를 세운 레자 샤는 성벽을 헐고 직선도로를 내고, 잠시디예 공원을 조성하는 등 현대 도시의 기틀을 세웠다. 40km 떨어진 서쪽 교외 카라지 강에 댐을 건설해 전력을 공급하면서 소비도시는 공업도시로 탈바꿈했다. 뿐만 아니라, 서쪽 타브리즈부터 동쪽 마슈하드까지 잇는 철도를 내고, 테헤란 대학 등의 교육시설도 확충했다. 특히 20세기 초 중동에서 가장 먼저 석유를 채굴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국으로 떠오르면서 국명도 ‘이란’으로 바꾸어 ‘탈페르시아’를 표방했다.
급조한 현대화 과정은 전통과의 조화를 무시하고 서방 일변도로 치달았다. 결국 전통과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현대화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결과를 낳았으니 1979년 팔레비 왕조를 뒤집은 이슬람 혁명은 바로 그 산물이다. 혁명 뒤 20여 년간, 전통과 현대의 갈등은 엄존하고 있다. 요컨대, 20세기를 기점으로 전통과 현대는 새끼줄의 두 오리처럼 얼기설기 얽히고 뒤치락거리면서 이란의 오늘로 이어져 왔다.
8월 12일, 오랜만에 보는 흐린 날씨다. 울적하기보다는 상쾌하다. 테헤란 답사는 현대화의 ‘고물’로 남은 팔레비조의 여름 궁전 참관으로 시작했다. 시의 북쪽 끝, 엘브루즈 산맥의 나지막한 봉우리들로 에워싸인 사드 아바드 궁전 박물관이다. 원시림 같은 수풀로 뒤덮인 널따란 터 안에 18개 궁전이 흩어져 있는데, 몇 개는 박물관으로 개조했다. 포장된 오르막 숲길을 10분쯤 걸어 ‘청궁’(카헤 삽즈)에 이르렀다. 거울로 벽을 장식한 응접실 ‘거울의 방’을 비롯해 식당, 욕실, 침실은 몽땅 프랑스식으로 꾸몄고, 식기나 탁자, 의자 등의 집기도 최고급 프랑스제였다. 바닥에는 120수의 카펫을 깔았다. 모든 게 눈부실 정도로 사치스럽다. 엘브루즈 산맥의 한 봉우리로 치닫는 세계 최장(7km) 의 리프트도 아스라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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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된 채도 항아리. 동서교류의 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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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던 길을 되돌아 이른 곳은 경내에서 가장 큰 ‘백궁’(카헤 멜라트)이다. 원래 2대 샤의 왕비가 살던 궁이다. 곁에 군사박물관이 있지만, 수리 중이어서 안을 볼 수 없었다. 아쉬움 속에서도 흥미를 끈 것은 ‘백궁’ 정문 한쪽에 남은 가죽 장화 한 켤레의 조형물이다. 안내원 설명을 들으니, 원래 장화를 신고 선 레자 샤의 동상이었으나, 혁명 때 성난 시위대들이 몰려와 동상은 짓부수고 한 켤레 장화만 남겨놓았다고 한다. 분노 속에 되찾은 이성 덕분에 역사 현장을 증언하는 흉물을 한 점이라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널리 알려진 팔레비 일족들의 호화 행각은 분명 분수를 넘은, 현대 일변도의 일방통행이었다. 그래서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제 ‘현대’와 대립각을 세워온 전통의 현장을 찾을 차례다. 그 길을 찾다 우연히 사아디 거리의 옛 미국대사관 곁을 지나갔다. 혁명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질극 현장이다. 철조망에 싸여 정적이 감도는 건물 외벽엔 사탄 얼굴을 한 자유의 여신상이 그려져 있었다. 자유를 놓고 말한다면, 이란 사람들또한 그토록 갈망했던 것이기에, 호텔 이름도 ‘아자디’(자유)로 고치고, 1971년 페르시아 건국 2500주년을 맞아 세운 기념탑(높이 4)도 ‘아자디 탑’으로 이름짓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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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고고학박문관의 명물인, 1993년 체흐라바드강 언덕에서 출토된 1700여년 전 ‘소금인간’의 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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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찾은 곳은 이란 고고학박물관이다. 기원전 6천년께부터 19세기까지의 각종 역사 유물과 미술품이 본관, 별관으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다. 원통 인장과 채도, 루리스탄 청동기 같은 동서교류의 상징물들, 하무라비 법전 복사본과 다리우스 1세 동상, 페르세폴리스 궁전 알현도, B 혈액형에 나이 37세인 1700년 전 ‘소금인간’의 다소곳한 모습 등이 눈에 띈다.
장화만 남은 팔레비왕의 동상
뒤이어 들린 압기네 박물관은 90여년 전 지은 아담한 2층 건물로서, 한때 이집트 대사관이었다. 지금은 유리와 도자기 박물관이다. 도기 각배, 유리 봉수형(새머리 모양) 물병은 눈에 익숙한 유물들이며, 출처불명의 청자는 한참 발길을 멈추게 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카펫(파르쉬) 박물관은 1978년 지은 현대적 시설로, 15세기~20세기 초까지 짠 카펫 수작 100여점을 모아놓았다. 카펫을 수준 높은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전통적인 연주, 대칭 무늬말고도 이슬람 회화에서 기피하는 인물, 동물의 구상무늬도 대담하게 도입한 점이 눈을 끌었다. 이 모든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전통 유물들로서 현대와의 공존 속에 이룬 조화를 예시하고 있다. 테헤란 시가지도 현대 건물들이 즐비한 북쪽 신도시와 전통 가옥, 골목이 빠듯이 들어선 남쪽 구도시로 나뉜다. 말썽 많은 히잡도 남북 신구도시 사이엔 쓰임새가 달라 보인다. 테헤란은 어느 모로 보나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면서도 갈등이 다분한 도시로 비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 진통으로서 이란 국민들은 갈등을 잘 극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친미’ 일방통행으로 깨진 아리안 부흥 꿈
팔레비왕조의 개혁과 몰락
이란 근대화를 지상목표로 추진했던 팔레비왕조는 원래 반외세적 성향이 뚜렷한 통치집단이었다. 1925년 왕조를 세운 레자 샤 팔레비는 전대 카자르왕조의 무관 출신으로 21년 쿠데타를 일으켜 테헤란을 차지한 뒤 스스로 국왕 자리에 올랐다. 튀르크계 이민족인 카자르왕조 지배자들의 무능과 외세 의존을 혐오했던 레자 샤는 옛 페르시아의 영광과 근대 국가의 부흥을 꿈꿨다.
오스만제국을 세속 국가로 만든 동시대 터키 통치자 아타튀르크의 영향을 받은 샤는 국토 종단 철도 건설, 여성의 히잡 착용 의무 폐지 등의 서구화 정책을 실행했다. 1차 세계대전까지 이란이 외세의 각축장이 된 데 분노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서구 국가들의 치외법권,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아랍 세력과 혼인동맹을 맺어 유럽 입김을 떨쳐내고자 애썼다. 35년 ‘아리안의 나라’란 뜻의 이란을 새 국호로 정하고 전통 산업, 풍속의 부흥을 꾀한 것도 그런 의도였다.
그러나 레자 샤는 같은 아리안 뿌리를 지닌 나치 독일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가 2차 대전 때 영국과 소련의 침입을 자초하고 만다. 결국 41년 레자 샤는 퇴위하고 아들 무하마드 레자 팔레비에게 권력을 넘겨준다. 레자 팔레비는 부친과 달리 철저한 친미주의자였다. 50년대 초 석유 국유화를 단행한 자주파 모사데크 총리를 미국 의 도움으로 축출하고 전제 권력을 확보했다.
팔레비는 63년 농지 개혁, 여성 참정권 등 6개 항목의 국정 대개혁(백색혁명)을 강행했고, 원유수출로 쌓인 국부를 바탕으로 경제개발계획도 실행했다. 하지만 팔레비의 국가 개조와 71년의 건국 2500돌 대축제, 74년 아시안게임 같은 현대적 이벤트들은 시아파 신앙의 전통이 뿌리깊은 국민들에게 별 환영을 받지 못했고, 미국 권익만 대변한다는 반발을 샀다. 급기야 잇따른 경제 실정과 반정부 시아파 지도자 탄압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이 발발한다. 쫓겨난 팔레비 왕은 유럽 등지를 전전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이듬해 실의 속에 숨졌다.
팔레비왕조 몰락은 어떤 서구식 근대화도 이슬람의 종교유산 자체를 뒤흔들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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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취재 임종업 blitz@hani.co.kr,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김경호 jijae@hani.co.kr,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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