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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1 19:53 수정 : 2006.06.02 10:06

야즈드에 있는 두 개의 ‘침묵의 탑’. 왼쪽 높은 탑(70m)에는 남자의 주검을 얹고 오른쪽 낮은 탑(50m)에는 여자의 주검을 얹어 놓아 새들이 뜯어먹게 하는 ‘조장’의 장소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33> 조로아스터교 성지, 야즈드

이란 고원의 언저리에 자리한 야즈드는 유서 깊은 사막의 도시다. 일찍이 13세기 70년대 마르코 폴로는 이곳을 지나면서 받은 인상을 ‘매우 훌륭하고 당당한 도시로서 활발한 무역’이 진행되고, 상인들은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야스디’(야즈드)란 비단옷을 교역해 많은 이익을 얻고 있으며, 주민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한다고 여행기 <동방견문록>에 적고 있다. 야즈드에 대한 역사적 증언으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그 증언에는 간과한 점이 하나 있다. 이 고장이 조로아스터교(일명 마즈드교)의 발원지이자 성지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야즈드에서의 답사일정은 조로아스터교의 흔적을 찾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시 남쪽 변두리 사막의 나지막한 언덕에 각각 높이 50m와 70m쯤 되는 흙모래 산 두 개가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다크메이 자르토슈티얀’, 즉 ‘조로아스터교 신도의 장지’인데, 일반적으로 ‘침묵의 탑’(타크메)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입구에서 오른편에 있는 여자들의 장지인 낮은 ‘탑’을 택했다. 비스듬히 경사진 나선형 길을 따라 정상에 올라서 보니 안지름이 10m, 높이 가량 되는 원형 흙벽돌 벽이 둘러져 있으며, 바닥 한가운데 구덩이가 움푹 패여 있다.

여자 주검을 얹어 놓는 ‘침묵의 탑’ 소그이 구덩이.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인 아테슈카데 사원 안의 1532년 된 불씨.

최초의 계시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켜, 영혼은 영원하지만, 육체는 죽으면 불결한 흉물로 변해 신성한 흙이나 물, 불과 접촉할 수 없다. 그래서 토장이나 화장은 할 수 없는 터, 결국 주검은 땅과 분리된 높은 곳에 얹어놓고 독수리 같은 새가 뜯어먹게 해 그 존재를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검을 구덩이 위에 올려놓으면 새가 와서 뜯어먹고, 살이 삭아지면 걸러진 백골만이 아래로 굴러 떨어져 마치 탑처럼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죽은 자니 침묵할 수밖에 없고, 또 주검은 불결하니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조장(鳥葬)의 장지를 ‘침묵의 탑’이라 일컫는가 보다.

원래 조장은 하늘과 더불어 새를 신성시하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신앙에 따르면 새는 인간의 영혼을 하늘로 운반하는 매개체이며 영물이다. 그런데 그 운반과정을 단축시키기 위해, 이를테면 새에게 빨리 뜯기기 위해, 별별 끔직한 짓을 불사하는 관행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미신도 엉켜있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우, 사자의 오른쪽 눈이 먼저 파먹히면 선인으로 낙원에 가고, 왼쪽 눈이면 악인으로 지옥에 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이란은 이러한 매장법이 전근대적이란 이유로 70여년 전에 법으로 금지했다.

니체가 추앙한 ‘차라투스트라’가 창시
‘영혼은 영원, 주검은 불결’ 교리 따라 주검은 돌구덩이 넣어 새가 먹게 장례
1532년간 지핀 ‘사원의 불’ 경이로워 이슬람에 잠식 불구 2500년 생명력


이튿날 이교도의 참관이 허용되는 아테슈카데 사원을 찾았다. 아테슈카데는 페르시아어로 ‘불의 집’이란 뜻이다. 시 중심에 있는 베헤슈티 광장에서 카샤니 거리를 따라 ‘침묵의 탑’ 방향으로 5분쯤 가니 크림색 담장을 두른 사원 건물(1934년에 지음)이 나타난다.

사원이자 박물관이기도 한 이 곳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1532년 동안이나 꺼지지 않고 지펴있는 불이다. 화로에 담겨져 있는 이 불은 원래 남부 파르스의 아잘파란바흐 사원에 보존되었던 불씨를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2500여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조로아스터교의 끈질긴 생명력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다. 이 종교에서 불은 선신의 상징 중 하나로서 불을 통해 신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믿을 뿐, 불 자체를 숭배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불을 숭배하는 종교인양 ‘배화교’(拜火敎)로 한역한 것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밖에 천교라는 한역도 있는데, 이것은 조로아스터교를 화천, 즉 ‘불의 신’을 믿는 종교로 오해한 데서 나온 오역이라고 추단된다.

입구의 맞은편 벽에는 전형적인 성화(聖畵)기법으로 그린 교조 조로아스터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조로아스터에 관해서는 17세기 말 프랑스의 앙케틸에 의해 <벤디다드> 같은 경문이 발견되면서부터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지금까지도 숱한 베일에 싸여있다. 본명은 페르시아어로 차(자)라투스트라인데, 영어로 조로아스터라고 불린다.

오늘의 이란 서부 쉬즈 지방에서 기원전 7~6세기에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세상사, 특히 존재의 의미에 관해 고민과 사색을 거듭하던 끝에 약관 20세에 속세를 등지고 입산 칩거하면서 명상에 잠기고 금욕생활을 시작한다. 드디어 삼십대에 신으로부터 예언자로 점지되어 계시를 받고 설교에 나선다. 8년 동안 정직, 바른 사고, 정의, 겸손, 성취, 불멸 등 신의 속성을 대변하는 여섯 명의 최고 천사(아메셔 스판드)를 만나 교리를 다듬고 전파하는 데 진력했으나. 여의치 않아 실망했을 때 악령이 찾아와 종교를 버리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그는 분연히 거부하고 동부지방의 발흐(오늘의 아프가니스탄 영내)로 자리를 옮긴다. 2년간 투옥되는 시련을 이겨내고 끝내 왕을 설복해 그의 보호와 후원을 받기에 이른다. 왕은 1만2천마리의 소가죽을 무두질해 햇볕에 말린 후 그 위에 경전 <아베스타>를 쓰도록 명한다. 만들어졌다고 하는 경전이 전해진 바는 없다. 그는 한 유목민과의 ‘성전’을 벌이다 77년간의 생을 마감한다.

아테슈카데 사원의 벽에 그려진 창시자 조로아스터의 초상화.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등 기라성 같은 현자들이 동서양에서 자웅을 견주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시대에 그 완충지에서 태어나 활동한 조로아스터는 단연 선구였다. 근 2천년이나 지난 후에도 철학자 니체는 명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위버멘시’(초인)로 대표되는 차라투스트라를 대지의 주인이며 인류의 미래를 이끌어갈 향도자로 추앙한다.

교조가 ‘지식’이란 뜻을 지닌 경전 <아베스타>를 통해 설파한 교리는 유목사회로부터 농경정착사회로 넘어가는 역사적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바탕인 신관은 다신교로부터 이신교(선신과 악신)를 거쳐 일신교로 승화하는 지향성을 표방하고 있다. 그 핵심은 선과 밝음을 상징하는 선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과 어둠을 상징하는 악신 아리만간의 경쟁과 투쟁을 통해 마침내 선이 악을 이겨 아후라 마즈다가 유일신이 되어 우주를 통괄한다는 것이다. 조로아스터 사후 3천년이 되면 구세주가 나타나는데, 그때 인간은 그의 앞에서 부활해 최후심판을 받는다.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 바른 말을 한 선인은 천국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무사히 통과하나, 그렇지 못한 악인은 다리에서 발을 헛디뎌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유대교나 기독교, 이슬람교에서의 최후심판론이나 부활론, 불교의 응보설의 연유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조로아스터교는 발상지 페르시아에서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 중엽까지 천여년 동안 성세를 누리다가 이슬람교에게 잠식당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신도수는 약 15만(이란에 4만5천명)밖에 안되는데, 그중 1만5천명가량이 발원지 야즈드 부근에 잔류해 있으며, 인도 봄베이 지역에 근 10만명이 모여살고 있다. 그 여파는 중국까지 미쳤다. 수·당시대에 페르시아와의 내왕과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그 물결을 타고 천교라 일컬은 조로아스터교가 들어와 번창하다가 845년 회창법란 때 불교탄압정책의 곁불에 얻어맞아 이른바 ‘삼이교’(三夷敎, 세 오랑캐 종교)의 하나로 낙인되어 제재를 받게 된다.

아무리 이채로워도 모진 풍상 속에서 제 모습을 이어온 조로아스터교와 그 유적은 분명 인류의 공동문화유산이다. 일행을 안내한 아테슈카데 사원의 근엄한 사제는 “조로아스터의 불길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하면서 우리 일행을 바래주었다. 굳은 믿음, 그것은 언제나 역사를 불태우는 불꽃이고, 역사의 흐름을 채워주는 샘물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이슬람 기독교 불교 등 세계 종교의 원형

아테슈카데 사원 정문에 조각된 조로아스터교의 상징물.

조로아스터교의 영향
조로아스터교는 오늘날 인도 뭄바이와 이란 야즈드, 아제르바이잔 등지에서 15만여명의 신자들만이 교세를 잇고 있다. 이슬람에 밀려 군소 종교로 퇴락했지만, 고대부터 중세까지 조로아스터교가 실크로드 문화사에 미친 영향은 여느 세계종교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기원전 6~7세기 실크로드 핵심 통로인 아랄해 남부의 콰리즘 혹은 동이란 지역에서 선지자 조로아스터에 의해 창시된 이 종교의 가장 큰 종교사적 의미는 전파과정에서 이슬람, 기독교, 불교 등 오늘날 세계 종교의 원형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우주를 다스리는 유일신(아후라 마즈다) 신앙과 선악의 대립 갈등, 구세주가 선인과 악인을 심판하는 종말론 등 특유의 교리 체계는 후대 기독교, 이슬람교, 마니교의 주된 뼈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불교 미륵신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조로아스터교가 세계 최초의 통일적 제국이던 고대 페르시아와 실크로드 국제 문화의 원형을 창출한 사산조 이란왕조의 국교였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방대한 제국을 문화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아리안족 신화를 바탕으로 다른 민족들의 신화·신앙과 결합한 보편적 종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산조 이래 조로아스터교는 실크로드 교역로를 타고 활발하게 전파된다. 특히 열렬한 신봉자였던 이란계 소그드인들은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의 동방 전교에 큰 구실을 하게 된다. 조로아스터교의 온상이었던 시무다리야, 아무다리야 강 사이에 본거지를 두었던 그들은 10세기까지 신장성과 중국 장안에 상업거점을 건설하면서 중원 지역에까지 조로아스터교를 퍼뜨렸다. 당대 중국에서는 천교라고 불리웠으며 장안의 이란인 거주지마다 사원인 ‘천사’가 있어 토화, 탄도 같은 불의 제례를 올렸다고 당대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종교의 신비신앙은 중국의 민간신앙 속에 스며들어 송·원시대까지 천사의 의식 등이 문학작품 일부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땅의 신라·고려 유물들에도 조로아스터교의 흔적은 남아있으니 바로 구슬 고리 안에 여러 동물, 식물 문양을 넣은 연주문이다. 연주문은 진주를 좋아하던 이란인들의 심미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구슬 문양 안에 신적인 이미지와 권위를 동물 형상으로 상징화해 표현했던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도상 체계와 연관된 양식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단

취재 임종업 blitz@hani.co.kr,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김경호 jijae@hani.co.kr,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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