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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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내용인 듯하다. 폴란드 태생의 과학자 퀴리 부인이 어린 시절 식민지 모국인 러시아의 시학관 앞에서 굴욕적인 질문에 러시아어로 답하고 난 뒤 선생님의 품에 안겨 울먹였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새삼 흥미롭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퀴리 부인이 시학관 앞에서 대표로 답변할 만큼 지배자의 언어조차도 잘하는 똑똑한 학생이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대중교육 단계에서 배우는 “지식”을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정한 이해력과 암기력 등의 보편적인 능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쉽게 말해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그다지 쓸데없는 지식, 때로는 유해한 지식마저도 남다른 흡수능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유신독재 시절, 늘 일등을 도맡아 하던 우리 반 반장은 불과 몇 년 지나 용도 폐기될 운명이었던 유신헌법 전문 따위도 줄줄 외고 다녔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끝없는 스펙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취업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마다할 여유가 없는 그들에게 최근 새롭게 또 하나의 아이템이 추가되었다. 경제지식을 객관식으로(!) 테스트하여 등급까지 매겨준다는 이른바 경제이해력시험이다. 이미 매회 응시자가 수천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시험의 누리집에 가보니, 젊은 시절 시험의 달인이라 알려졌던 어느 국회의원이 이 시험을 치르고 나서 “국민들에게 정말 유익한 시험”이라고 덕담하는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런데 기출문제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그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금방 드러난다. 시장논리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이야 대다수 경제학자들도 그 모양이니 그렇다 치자. 특히 노동자 권익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재벌의 가족경영을 합리화하는 부분에 이르면 한마디로 치졸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다. 어차피 재벌의 돈줄로 운영되는 경제신문사가 주관하는 시험이니 그 치졸함이야 그냥 웃어넘겨 버릴 수도 있겠다. 심각한 것은 재벌기업이나 경영자의 특수이익을 보편이익인 양 교육하고 그것을 객관식 시험을 통해 줄세운다는 점, 다시 말해 전형적인 한국적 서열경쟁 방식과 일방적으로 왜곡된 시장논리가 기묘하게 혼합된 오늘의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판적 지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는 대학, 그 한 귀퉁이에서 밥벌이하는 내가 대부분 노동자나 자영업자가 될 수밖에 없을 학생들에게 무엇이라 가르쳐야 할까? 일단 재벌의 언어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점수를 얻어야 그들의 세계에 한 발이라도 걸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까? 그냥 적당히 운전면허시험 치듯 통과의례로 여기고 한 가지 스펙이라도 더 쌓으라고 말할까? 아니면 무의미해져 버린 대학을 자퇴하면서 대자보를 써 붙인 어느 대학생처럼 온몸으로 저항하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려서부터 스펙을 쌓고 경쟁력을 키웠던 그 옛날 우리의 똑똑한 아이들. 그들은 길 가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가슴에 손을 얹었고,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나 “중단 없는 전진” 따위가 실린 교과서로 공부했다. 그렇게 자라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한 “일류 언론사”에서 그들은 이제 후배 세대의 절박한 욕망을 담보로 잡은 채 재벌체제를 합리화하거나 노동조합의 부정적 기능을 정답으로 요구하는 시험을 내고 있다. 그 후배들이 어쩔 수 없이 욕망하는 “초일류기업”에 대한 정당한 비판의 목소리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하릴없이 무릎을 꿇는다. 나는 오늘 문득 검은 제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되어, 아침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송하고 사회탐구 시험에는 독재자의 어록이 출제되는 악몽에 시달린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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