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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2.17 20:32 수정 : 2010.02.17 20:32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다시 올림픽의 계절이다. 영웅이 탄생한 한편에서 “지나친 경쟁의식”으로 국가적 위업 달성을 놓치게 만들었다는 선수에 대한 비난도 시작되었다. 그 틈을 파고든 얄미운 외국 선수에 대한 인신공격이나, 텔레비전 화면을 타고 흐르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수준의 우리 편들기 해설 또한 여전하다.

스포츠를 굳이 한국 경제에 관한 상징적 예화로 갖다 붙여 해석하려는 것은 경제학자로서의 편집증일 게다. 그러나 몇몇 대기업의 놀라운 성과에도 얼어붙은 고용사정을 보거나, 원자력발전 수주의 “국민적 쾌거”와 좌파정권의 폐해를 즉각적으로 연결짓는 인터넷의 댓글 따위를 떠올리노라면, 이런 편집증은 다시 도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커피전문점조차 강북보다는 강남에 훨씬 많다는 커피 소비의 양극화·계급화에 관한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그렇지만 정작 커피점을 경영하는 자영업주 입장에서 볼 때, 개업에서 폐업에 이르는 수명주기가 엄청나게 빨라지고 있음은 굳이 조사해보지 않아도 실생활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곳에서 일하는 “알바”들의 애환은 입에 올릴 필요도 없으리라. 대형 할인마트의 가격파괴가 결국은 협력업체의 자영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더 많은 희생에 기초한다는 것 또한 잘 알려져 있다. 결국 한국 경제는 자영업자 또는 자영업의 외관을 갖는 불안정 취업자의 자기 노동력 착취에 기초하여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세계시장을 석권한 재벌기업 몇 개가 비약적인 성장을 계속해도 전체 경제의 체질은 취약해지는 현상을 피할 길이 없다. 몇몇 엘리트 선수들은 세계를 제패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평소 스케이트장 근처에도 안 가는 것과 비슷한 구조인 셈이다.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를 사회과학적으로 어떻게 개념규정할 것인가는 여전히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그렇지만 학문적 논의와 상관없이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해진 현상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부터 유력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경쟁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먹고사는 과정에서 몸으로 겪고 당한 바를 생존전략으로 삼을 뿐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경제이론의 영역에서 신자유주의의 중요한 문제는 시장과 국가를 대립시키고 모든 좋은 것은 시장의 이름으로, 모든 나쁜 것은 국가의 이름으로 불렀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정치권력으로서의 국가의 힘은 그 어느 때 못지않게 강력하게 작용하는 현실 속에서도, 공공성을 추구하려는 국가의 행위는 심지어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매도되기까지 한다. 그 따름정리로 국가는 중립적으로 법질서를 집행하는 기관이라는 환상만 남게 되었다. 이런 환상이 현실에서는 엄청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매일 목도하고 있다. 이를테면 올림픽 유치라는 “국가적 과제”를 위해 최고권력자가 재벌그룹 회장을 사면해주는 행위는 적어도 하급공무원들이 몇만원의 당비를 진보정당에 납부하는 행위에 비해 정치권력의 특정 계층 편들기라는 측면에서는 훨씬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후자는 위법인 반면, 전자는 실정법상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러므로 국가는 무색무취한 실체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 끊임없이 다시 구성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새로이 정의되는 국가를 통해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더욱 명확하게 공공성을 앞세운, 공공성의 경제를 추구하는 일이다. 금메달에 대한 집착이 생활체육의 발전을 보장해주지 못하듯이, 성장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결코 공공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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