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1.27 21:23
수정 : 2010.01.27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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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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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으로 수많은 이가 희생된 아이티는 굶주린 아이들이 진흙으로 구운 쿠키를 먹으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라틴아메리카 최악의 극빈국이다. 이 끔찍한 아이티의 빈곤은 정부의 무능력과 부정부패 외에도 외세의 간섭과 정치불안으로 가득한 슬픈 역사와 관련이 있다. 아이티는 1804년 흑인 노예들의 저항으로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독립국가가 되었지만, 프랑스는 그 대가로 엄청난 돈을 요구했고 미국은 오랫동안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은 1915년 아이티를 침공하고 점령해 수만명을 학살했고, 쿠바를 견제하기 위해 1950년대부터 30여년 동안 엄청난 부패를 저질렀던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정권을 지원했다.
1994년 클린턴 정부는, 1990년 대통령으로 뽑혔지만 몇 달 뒤 쿠데타로 실각한 민주인사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의 복귀를 도왔다. 하지만 이것도 미국으로 난민이 유입되는 것과 아이티의 민중 반란을 우려한 때문이었으며, 급진적 개혁을 포기하고 민영화와 개방 등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2000년 다시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리스티드는 최저임금을 올리고 빈곤층을 위한 교육과 의료 지출을 늘리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부시 정부는 아이티에 압력을 가하고 국제금융기구들도 원조와 차관을 중단하여, 경제는 더욱 피폐해졌다. 결국 그는 2004년 미국이 묵인하는 군사쿠데타로 아프리카로 망명했고, 이후 국제사회가 아이티를 다스리고 있지만 혼란과 부패, 치안 공백이 계속되었다.
미국과 국제기구의 조언을 따라 추진했던 경제구조조정과 농업개방의 실패도 아이티의 빈곤을 심화시켰다. 아이티는 1986년 국제통화기금(IMF)에 돈을 빌리며 쌀시장을 개방했고, 1995년에는 국제기구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라 수입쌀의 관세를 35%에서 3%로 급격히 내렸다. 이에 따라 미국 쌀이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고, 30년 전에는 자급률이 100%에 가까웠던 아이티의 쌀농업은 몰락하고 말았다. 다른 국가에 시장개방을 강요하면서, 자국의 농업에는 엄청난 보조금을 주고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는 미국의 이중적인 무역정책이 아이티 농업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
또한 80년대 초 미국과 국제기구는 돌림병에 걸린 아이티의 토종돼지를 몰살하고 아이티에 미국 돼지를 들이도록 조언했다. 미국 돼지는 물과 사료 등 사육을 위해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아이티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했고, 아이티 농가에 수억달러에 이르는 피해를 주었다. 농업이 황폐화된 아이티에서는 산림 벌채로 숲들도 사라졌고, 2008년에는 식량부족 사태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번 지진에도 빈민들이 슬럼가의 판자촌에 몰려 살면서 피해가 더욱 커졌다.
아이티의 대지진 이후 각국이 구조라는 명목 아래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카리브해의 요충지인 아이티를 통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고려와 국제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각국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먼저 과거에 대해 책임을 느끼며 반성해야 할 것이고, 다른 나라들은 진정한 인도주의에 기초해 아이티를 돕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이티의 재건과 빈곤 해결을 위해서는 구호와 원조뿐 아니라 대외부채의 탕감, 부패 척결, 민주주의의 발전 등 다양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무조건적인 경제개방과 자유무역이 아니라, 정부의 보호와 지원에 기초한 농업의 재건 그리고 미국 농산물시장 개방 등 대안적인 정책 방향이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끔찍한 빈곤을 덮친 엄청난 재앙 앞에서 아이티는 도움의 손길 그 이상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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