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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1.20 22:05 수정 : 2010.01.20 22:05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전교조 가입 교사의 비율이 높은 학교일수록 학생들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보도되었다. 언뜻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의사가 많은 지역일수록 사망률이 높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어느 왕이 의사를 모두 죽여 버리라고 명령했다는 우화였다. 적도에 가까운 나라일수록 경제성장률이 낮다는 명제를 계량적 기법을 써서 증명하려는 경제학자에 관한 우화는 또 어떨까? 아무리 선입견이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더라도 최소한의 양식을 갖춘 경제학자라면 설마 그런 우화 같은 주장을 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언론의 선정성 탓이라 여기고 넘어가기로 하자.

오히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런 뉴스가 통상적인 학부모나 학생 개개인의 욕망을 가려운 데 긁어주듯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전교조가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거나 심지어는 학생들의 “좌경 의식화”를 추구하는 조직이라 치자. 설사 그렇더라도 학생들의 수능성적이 전교조의 효과를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려면 약간의 논리적인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학생들 전체의 수능성적 상승이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하다는 것, 경제학자들이 좋아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국가경쟁력이나 생산성을 증대시킨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뉴스가 예컨대 두발제한 철폐 같은 이슈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학교의 평균성적이 높아지면 그 학교에 다니는 내 아이의 성적도 높아지지 않을까라는 기대와 다르지 않다.

이른바 진보세력이 이런 개인적 욕구와 공익적 대의명분 사이의 갈등을 애써 무시하면서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득권을 가진 보수세력은 적어도 사후적으로라도 이런 갈등을 은폐하는 구실을 하곤 했다. 이는 비단 수능성적만의 일은 아니다. 비슷한 문제는 이른바 “나라경제”에서도 생겨난다.

우리 개인들은 너나없이 모두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과 성장을 욕망하는 주체이다. 그렇지만 사회 전체의 거시적 성장이 반드시 우리들 개개인의 성장을 가져다주지는 않으며, 역으로 우리들 개개인의 성장이 사회 전체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일상적인 정치와 미디어의 담론에서 이 두 가지는 종종 같은 것으로 다루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제성장이나 민생이라는 정치적 수사 속에 많은 문제들이 파묻혀 들어간다. 언론관계법도 세종시도 심지어는 “사법개혁”도 모조리 민생문제라고 주장된다. 이때 경제성장은 마치 사령관의 지휘 아래 온 국민이 대오에서 이탈함이 없이 한길로 나아가야 하는 목표인 것처럼 취급된다. 이와 짝을 이루는 것이 국가는 중립적인 실체라는 환상이다. 교육과학기술부가 특정 학교의 수능성적 향상을 위해 노력하지 않듯이, 국가가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기대인 셈이다.

하지만 공무원들을 모아 놓고 세종시 수정안 홍보지침을 하달하는, 민방위 훈련장을 연상하게 만드는 장면이나, 정치적 견해에 따라 때로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때로는 판사의 “이념적 성향”을 문제삼는 언론보도 등은 역설적인 의미에서 세상 모든 일이 민생문제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국가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것 자체가 끊임없는 토론과 견제의 대상이어야 함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국가가 나한테 해주는 것”은 국가기구를 움직이는 이들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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