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11.04 19:23
수정 : 2009.11.04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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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규 성공회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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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씁쓸한 느낌을 주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금융감독원이 ‘위기 이후의 금융감독 과제에 대한 보고서’를 공개하기로 공지했다가 세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취소했다는 것이다. 10월 말의 일이다. 이 보고서는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3월31일 “금융감독 기능을 체계적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힌 데서 시작되었으며, 금융위기를 맞아 금융개혁의 필요성이 널리 공감을 얻었기에 많은 기대를 모았다. 그 직전에 영국 금융감독청(FSA)의 터너 의장이 발표한 금융위기와 금융감독 업무의 종합적인 개선방안에 대한 보고서에 빗대어 한국판 터너 보고서(Turner Review)라고 불리기도 했다. 터너 보고서에는 시스템 리스크 유발에 대한 획기적 감독 변화, 은행의 자본과 유동성에 대한 근원적 개혁, 헤지펀드나 투자은행과 같이 그간 규제를 받지 않았던 부문에 대한 감독, 임직원 보상체계에 대한 개혁, 신용평가기관과 자본시장에 대한 감독 등 이번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온 중요한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스럽게 느낀 것은 금융당국의 일부에서라도 금융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제 그 약속을 지켜 보고서를 마무리했다는 점이다. 내용과 무관하게 대단한 일이다. 전세계적으로 금융 기득권 세력과 이대로는 안 된다는 금융개혁 세력 간에 대립이 첨예하고, 최근에 올수록 금융개혁 세력의 힘이 현저히 약화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한국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씁쓸하게 느낀 것은 공개가 좌초됨으로써 1997년 이후 한국 금융체제가 겪어 온 변화를 점검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할 기회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난 십수년간 우리 당국이 추구해 온 것은 미국식 금융제도로의 전환이었다.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에 대한 미국식의 규제폐지와 자유화를 추종하고, 상업은행을 투자은행으로 만들고 대형화를 유도하고, 헤지펀드를 육성하고, 파생상품 시장을 활성화하려고 애써 왔다. 재테크 붐을 정책적으로 조성해서 전 국민을 주식시장에 끌어들이고, 국가 차원의 투자 헤지펀드를 조성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번 위기에서도 보았듯이 2천 수백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을 가지고도 외환위기의 공포에 떨 정도로 한국 금융은 여전히 취약했다. 금융개혁 논의는 그간의 정책 추진 과정을 재점검하고 국민경제와 국민생활의 불안정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인데, 아쉽게도 이번에 그 기회를 놓친 느낌이다.
보고서의 공개가 중단된 것은 표면적으로는 “금융위원회, 청와대 등과 협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는가. 공식 금융당국이 7개월여를 준비해 온 방안에 대해 정부 내에서 전혀 소통이 없었다는 말인데, 이게 사실이라면 콩가루 정부다. 이걸 믿고 싶지는 않다. 다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이번 금융개혁 보고서가 정권의 의중에 맞지 않아 일어난 일일 가능성이 있다. 국정감사에서 황영기 전 케이비(KB)금융지주 회장은 우리은행의 파생상품 투자 손실과 관련해서 “자신의 책임만큼 금융당국도 책임이 있다”고 의미심장한 증언을 했다. 그가 파생상품에 대한 투자 결정을 내릴 때 관련 당국은 흐뭇하게 지지하지 않았느냐는 항변이다. 또 산업은행장을 겸하는 산은금융지주 신임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세계 10위권의 상업투자은행으로 가겠다고 했다. 이쯤 보면 이번 보고서 소동을 금융 기득권 세력과 금융개혁 세력 간의 대립이라는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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