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22 21:09
수정 : 2008.10.22 21:09
|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
삶과경제
얼마 전 정부는 대외채권 회수의무 폐지 등 연내 실시하기로 했던 2단계 외환자유화 조처를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원래 외환자유화는 외환위기 이후 1999년에 기업과 금융기관의 대외영업활동과 관련한 외환거래를 자유화하는 1단계 조처가 시행되었고, 2001년부터 개인의 외환거래를 대폭 자유화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2단계 조처가 단계적으로 시행되어 온 것이다.
2단계 외환자유화 시행이 예고되었을 때 필자는 <한겨레> 지면을 통해서 “불법적 자본 도피까지도 마다지 않던 일부 부유층들에게 합법적 자본 도피의 길을 활짝 열어주면 국내 경제가 불안해질 때마다 대규모 국외 자본 도피가 발생할 게 뻔하다. (중략) 제2의 환란이 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라며 2단계 외환자유화 철회를 주장했다. 그랬더니 당시 재경부에서 연락이 왔다. 전문가 회의를 개최하여 정책을 재검토하고자 하니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회의에 참석한 담당국장을 비롯한 공무원들은 물론이고 나를 제외한 너덧 명의 외부전문가들도 한결같이 2단계 외환자유화에 찬성이란다. 중과부적이라, 수세에 몰린 나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용기를 냈다. 전문지식으로 논쟁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아이엠에프 위기로 여기 계신 분들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나요? 직장을 잃고, 가족이 흩어지고,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아픔을 아시나요? 정책을 책임지신 분들은 실제로 무슨 책임을 지셨나요? 지금 제가 노트에 여기 참석하신 분들 이름을 다 적었습니다. 만약에 언젠가 제2의 환란이 오면 이 자리에서 외환자유화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 밝히면서 공개적으로 책임을 묻겠습니다.” 분위기 정말 썰렁해졌다. 하지만 효과는 톡톡히 있었다. 외부 전문가들이 갑자기 외환자유화의 위험성과 보완대책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분 좋은 반전이었다. 덕분에 보완책도 조금 강화되고 자유화의 속도도 조금은 조정되었다. 무용담을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잘못과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겪은 일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는 금융시장 안정 대책, 건설부문 지원 대책을 내놓으며 애를 쓰고 있다. 세계 금융위기의 파고 속에서 한국 경제가 난파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노력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단기 외화자금을 들여와 외형 경쟁에만 치중하다가 외화 유동성 부족 사태를 초래한 은행들이나, 부동산 투기 붐을 타고 천정부지로 땅값을 올리고 분양값을 올리다가 대규모 미분양 사태를 초래한 건설사들이 괘씸하기 그지없다. 이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도 시원찮을 판인데 우리 돈으로 지원까지 해주다니! 그래서 이들의 방만한 경영에 대한 엄중한 책임 추궁과 철저한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민간 부문의 책임 추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감독당국이나 정책당국에 대한 책임 추궁이다. 은행의 방만 경영과 위험관리 실패를 탓하기에 앞서 감독당국의 책임도 따져봐야 하지 않나? 부동산 버블을 키워놓은 관료들의 경우는 어떤가? 가계부채가 미국만큼 크지 않으니 괜찮다고 주장하던 당국자들은 어디 갔나? 단기외채의 급증이 가져오는 위험을 내다보지 못하고 환율 압력을 해소해보겠답시고 국외 부동산 취득 자유화와 국외펀드 비과세 혜택으로 대응한 경제관료들은 또 어떤가?
정부가 자신의 실패에 대해 엄중한 반성과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으니까 유사한 문제가 되풀이되고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는 것이다.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