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6.11 19:30
수정 : 2008.07.1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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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돌 고려대 교수, 조치원 마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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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경제
스웨덴에 칼 헨리크 로버트 박사가 있다. 그는 암 연구로 유명하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그 유지와 번식을 위해 핵심 요인들이 필요하다. 어느날 그는 바로 이 필수 요인들이 ‘경제 성장’ 과정에서 깨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어린이가 암에 걸린 경우처럼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깊은 연민을 느끼고 용기를 내어 남을 위해 희생할 수도 있음을 거듭 보았다. 이런 인식의 종합적 결과가 1989년에 ‘더 네추럴 스텝’ 운동으로 승화되었고 스웨덴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나는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풀뿌리 민중의 비전문가적 저항이 로버트 박사의 전문가적 통찰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음식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건강하다는 인식이 출발점이다. 아무리 자유무역이 좋고 돈벌이가 좋아도 미친소를 먹고 뇌에 구멍이 뚫려서야 되겠나 하는 위기의식, 바로 이것이 그간 잠잠하던 풀뿌리 민중을 광장으로 나서게 한다. 게다가 권력자들의 전형적인 ‘3D-전략’, 즉 문제 상황을 부인하고(deny), 지연하고(delay), 지배(dominate)하려는 꼼수들이 더욱 화나게 한다. 10대, 20대 청소년이 ‘아니오!’라며 나서기 시작하니 30대와 40, 50대가 ‘미안하다, 사랑한다!’며 나섰다. 심지어 60, 70대와 80대도 ‘우린 죽어도 좋다!’며 나섰다. 병원 노조가 ‘미친소’ 급식 거부를 외치니 운수 노조가 수송 거부를 외친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즐거움이 충만하다. 죽었던 직접 민주주의가 되살아난다. 그간 침묵하던 민중이 바른 말을 시작하니 쇠고기 문제뿐 아니라 교육 문제, 민영화 문제, 대운하 문제, 의료 문제, 물가 문제 등 온갖 삶의 문제가 한덩어리로 엮인다.
사태가 이러니 청와대 비서진이 사퇴하고 내각이 총사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이제부터라도 음식 건강을 넘어 ‘사회 건강’을 근본적으로 토론해야 한다. 사회가 건강하려면 그래서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면 진정 무엇이 필요한가. 첫째는 식·의·주 문제가 건강해야 한다. 둘째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자유롭고 여유롭게 살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학교 성적과는 무관하게 모든 인격이 존중돼야 하고 평등 사회가 되어야 한다. 넷째는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풀뿌리 공동체 관계가 되살아나야 한다. 다섯째는 사람을 포함한 온 생태계가 다양하고 순환하는 방식으로 살아나야 한다. 돈을 많이 번 뒤 이 모두를 해결하자는 발상은 스웨덴의 암 전문가 로버트 박사의 깨달음대로 ‘앞뒤가 안 맞다’.
그래서 이제 포기해야 한다. 탐욕을 포기하고 부자와 강자 따라하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죽어도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려는 의지다. 10대 여학생들이 ‘안전’을 무시하고 먼저 촛불을 든 것도, 조용하던 어머니들이 ‘위험하게’ 유모차를 끌고 나선 것도 더는 돈과 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나아가 아직 죽지 않은 우리 속의 이 건강한 생명력, 바로 이것이 또다시 국회나 정당, 가진자와 힘센자들에게 선점되거나 이용당하게 해선 안 된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긴 하나, 선거와 더불어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기 일쑤다. 광장의 정치, 직접 민주주의는 바로 이 사라진 풀뿌리 권력을 되찾는 일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우리의 심부름꾼들을 잘 부려야 한다. 꼼수는 곧 자충수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더 토끼 마을을 여우가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두루 사는 길이다.
강수돌 고려대 교수·조치원 마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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