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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3.14 17:47 수정 : 2007.03.14 17:47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나라살림가족살림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것이 사람 마음이기는 하지만, 오래 전부터 주식투자는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다. 그런데 2년 전 얼마 안 되는 쌈짓돈을 들고 은행을 찾아갔다가 창구 직원의 권유에 못 이겨 무슨 펀드에 가입한 것이 화근이었다. “경제학 교수님이시니 이머징 마켓이 유망한 것은 잘 아시죠?”라는 나긋나긋한 여직원의 한마디에 사실 거부할 명분이 없었던 탓도 크다. 시간이 흘러 만기가 된 날은 공교롭게도 중국 증시가 폭락하면서 이른바 ‘차이나 쇼크’가 시작된 날이었다. 은행 창구 모니터 앞에서 나는 내가 맡겨 놓았던 돈이 그렇게 많이(!) 불어 있다는 데 놀랐고, 다시 그날 하루 사이에만 그만큼(!)이나 줄어들고 있다는 데 더 놀랐다. 타이밍이 안 좋으니 팔지 말라는 직원의 강권 때문에 그냥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수직으로 하강하는 펀드수익률 그래프를 바라보는 한편으로 인터넷에서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중국 증시’라는 검색어까지 입력하면서 끙끙 앓았다. 그러다가 결국 “그래, 역시 주식은 가치투자야! 잊어버리고 장기간 보유하는 거야” 따위의 지극히 ‘교수스러운’ 합리화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경제학이 탄생하고 난 뒤 꽤 오랫동안 돈을 어떻게 버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뒤집어 말하면 어떻게 벌면 안 되는가에 관한 논의는 핵심적인 주제 중의 하나였다. 고전학파 경제학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은 해당 경제학자의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매우 중요한 주제였다. 고전학파를 비판하고 나왔으며 그 자신 주식으로 돈을 엄청나게 벌었던 케인스조차도 대표적 저서인 <일반이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를 긍정적인 맥락에서 말했다. 경제학에서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의 구분이 객관적 근거가 없는 가치판단에 의존하는 규범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현실적인 근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금융 세계화의 진전이 도대체 어디까지가 건전한 투자이고 어디서부터가 투기인지를 구분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흔히 투기자본의 이동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그렇게 하려 해도 그 의도처럼 쉽게 되겠느냐는 반문이 나오는 것도 그 탓이다.

그러나 나는 약간 엉뚱한 의미에서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 안의 투기자본’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이들은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런 것이고 그것이 시장경제의 활력이라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주상복합 오피스텔 분양권을 따내기 위해 이틀 동안 줄을 서고, 또 그들을 위해 일당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로 줄을 서는 이들이 모두 처음부터 투기자본의 본성을 간직하고 태어난 이들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다. 무리한 비용으로 아이들을 유학 보내고 자살에까지 이르는 이 땅의 기러기 아빠, 엄마들은 또 어떤가? 그래도 오피스텔 분양대금 치르고 필리핀으로라도 아이들 유학 보낼 수 있는 이들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생각하거나 조금만 노력하면 중산층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개인적 차원에서는 누구나 계층 사다리의 위쪽으로 올라가기를 꿈꾸면서도, 실상 그것이 다 함께 바닥으로 질주하는 것임을 깨닫기는 어렵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지역이나 이념의 대립을 넘어, 절망적인 바닥으로의 질주로부터 한국 사회가 한 걸음만이라도 물러설 수 있도록 해주는 담론의 활성화가 시급하다.

류동민/충남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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