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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5 18:43 수정 : 2020.01.05 18:58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루왁인간’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루왁인간’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제이티비시(JTBC) 드라마 페스타 <루왁인간>

대기업 영업부의 정차식(안내상)은 50대 중반의 만년 부장이다. 1986년에 입사해 4년 만에 사내 최고의 세일즈맨에 뽑힐 정도로 인정받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상사에게는 개처럼 굴어서 ‘펫차식’, 후배들에게는 한물간 퇴물이라 ‘폐차식’으로 불리는 처지다.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버텨오던 차식은 전무의 지시로 볼리비아산 원두 수입 진행을 떠맡았다가 50톤을 모조리 허공에 날려버리고 정리해고 대상자 1순위가 된다. 해고를 피하려 자존심도 내던지고 전무 앞에서 커피 열매를 한꺼번에 씹어 삼키는 쇼를 해봐도 돌아오는 건 후배들의 경멸 어린 시선과 비웃음뿐이다. 그날 밤 차식은 아픈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에 갔다가 몸에서 곱게 빠져나온 커피 생두를 발견하게 된다.

지난달 말부터 시작된 제이티비시(JTBC) 단막극 페스티벌 ‘2019~2020 드라마 페스타’의 첫 주자는 은퇴 위기에 처한 가장의 이야기 <루왁인간>이었다.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에서 당선된 강한빛 작가의 동명 단편을, 영화 <미성년>의 이보람 작가가 각색하고, 제이티비시 드라마 <으라차차 와이키키 2>의 라하나 피디(PD)가 연출했다. 사실 위기의 가장 이야기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중문화의 주류 서사로 자리잡았을 만큼 진부해진 소재다. 하지만 여성 제작진이 협업한 <루왁인간>에는 이런 ‘아버지 서사’에 넘쳐나는 중년 남성들의 과도한 자기연민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주인공 차식은 성실하지만 마냥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상사에게 아부하고 불합리한 지시도 무조건 따르는 차식의 태도는 후배들이 볼 때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구시대적 직장문화다. 대학 입학도 포기하고 자영업에 뛰어든 차식의 딸 지현(김미주)에게도 ‘남의 돈 벌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잔소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못마땅하긴 마찬가지다. 최소한 사람 사는 도리는 지키면서 산다고 자부했던 차식이, “인간으로서 자존심 좀 지키면서 살자”고 말하는 지현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장면은 ‘아버지들의 자기연민’ 서사와 <루왁인간>의 차이점을 잘 보여준다.

드라마는 단순히 가장의 노고와 서글픔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신, 각자의 위치에서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모든 인물의 애환을 따스하게 아우른다. 차식은 ‘희생적인 가장’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도 그에 걸맞은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인물들의 하나로 그려지면서 비로소 공감과 이입의 대상이 된다. 외환위기 때 회사에서 “나중에 준다”던 월급을 끝내 받지 못한 그와 동료들처럼, 국가의 위기 극복을 위해 다른 가치들을 희생하면서 성실히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나중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차식이 위기에 처할 때 환상처럼 등장하는 노래처럼, <루왁인간>은 우리 시대의 누적된 피로와 상처를 아프게, 그러나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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