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26 19:24
수정 : 2019.07.26 19:55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디 이스케이프 아티스트’
변호사 윌리엄 버턴(데이비드 테넌트)은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천재 변호사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영국에서 최고 등급의 공판변호사인 ‘칙선변호사’(queen’s counsel)로 젊은 나이에 임명될 것을 기대하는 윌리엄에게 리엄 포일(토비 케벌)이라는 남자가 변호를 의뢰해온다. 젊은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리엄은 천연덕스럽게 무죄를 주장한다. 윌리엄은 잔혹한 살해 방식과 리엄의 태도가 꺼림직하지만, “누구나 변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평소 신조대로 그의 변호를 맡게 된다. 불리한 상황에도 윌리엄은 기적적으로 리엄의 석방을 이끌어내고, 이 사건은 곧 윌리엄에게 엄청난 파국으로 돌아온다.
영국 드라마 <디 이스케이프 아티스트>(The Escape Artist)는 실패와 좌절이라고는 모르던 변호사가 자신이 앞장서서 유죄를 부인해준 사이코패스 때문에 일생일대의 시련을 겪게 되는 이야기다. 윌리엄 버턴이 리엄 포일의 목표물이 된 계기는 얼핏 보면 너무나 사소하다. 재판 승리 이후 꺼림직한 마음에 리엄의 악수를 거절한 행동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다. 단순한 행동이지만 리엄은 이를 엄청난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살인마인 자신이나 그 사실을 알고도 변호를 맡아 무죄를 주장한 윌리엄이나 한통속이다. 그런데도 재판이 끝나자마자 윌리엄은 자신이 그와 다르다는 듯 행동한다. 리엄은 그 오만한 태도를 용서할 수 없었다. 법학 전공자로 법에 해박했던 리엄은 이제 윌리엄이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법정에서 그를 위기에 빠뜨린다.
보통의 법정스릴러라면 윌리엄이 결국 자신의 장기를 발휘해 리엄을 응징하는 전개로 이어졌을 텐데 <디 이스케이프 아티스트>는 반대의 길을 간다. “일평생 법률에 살고 법률을 믿어왔던” 법의 수호신 같았던 인물이 그 법률에 뒤통수를 맞고 오히려 진실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재판 절차의 약점을 공격해 승리하는 장기를 발휘했던 윌리엄이 똑같은 수법으로 부메랑을 맞는 과정에서, 드라마는 형식을 중시하느라 정작 진실과 정의는 점점 뒤로 밀려나는 법제도의 한계를 지적한다. 사실상의 등급제도와 같은 영국의 변호사 제도가 변호사들 간의 경쟁을 심화시켜 실적에 목숨 걸게 만드는 현실 또한 비판 대상이 된다.
첫 회에서 리엄 포일의 재판을 앞둔 윌리엄이 아내에게 심란한 속을 내보이는 장면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내 친구가 12살 남자애를 변호했어. 친구 목에 배수관 청소액을 부어버렸대. 걔 핸드폰으로 게임을 못 하게 했다고.” 그리고 그가 덧붙인다. “세상이 조각나버렸어.” 윌리엄의 말에는 악과 범죄가 한층 복잡해진 시대에, 이전의 질서를 유지하던 법제도가 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더는 피해자를 보호해주지도 못하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드라마는 이런 윌리엄의 모순과 비극을 통해 정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법제도를 향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김선영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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