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드라마 ‘플라토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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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일본드라마 ‘플라토닉’
이혼하고 홀로 가정을 지키는 모치즈키 사라(나카야마 미호)는 심장이 약한 딸이 걱정스럽다. 딸은 5살까지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과 달리 10대 중반까지 살아남았으나 최근 발작이 부쩍 늘었다. 절박한 심정이 된 사라는 급기야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 글을 올린다. “어차피 죽을 거 제 딸에게 심장을 주세요.” 한 청년(도모토 쓰요시)이 조용히 응답한다. “제 심장을 드립니다.”
지난 5월25일부터 <엔에이치케이 비에스>(NHK BS) 프리미엄 채널에서 방영중인 <플라토닉>은 딸을 위해 타인의 심장이 필요한 여인과 그녀에게 심장을 주기로 한 남자의 비극적 로맨스다. 일본 드라마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설정만 보고도 작가를 짐작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플라토닉>은 어둡고 독한 내용으로 유명한 천재 작가 노지마 신지의 최신작이다. 1990년대 최고의 흥행작가이자 문제적 작가에서 2000년대 이후에는 범작들로 명성의 빛이 바랬던 그가 오랜만에 전성기적 색채를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첫회부터 작가 특유의 지독하리만치 냉정하고 잔혹한 전개가 이어졌다. 사라는 청년이 시한부 환자임을 알고는 딸을 위해 양심의 가책에 눈감는다. 게다가 특정인에게 심장을 기증받는 일이 장기매매에 해당한다는 얘기를 들은 뒤에는 ‘1촌 관계만은 예외’라는 조항에 의지해 청년과 위장결혼까지 감행한다. 감정이입하지 말라며 이름도 숨긴 채 모든 일을 선뜻 용인하는 청년도 기이하기는 마찬가지다.
인물들의 사연이 조금씩 드러나는 2회부터는 독한 설정에 가려졌던 내면에 서서히 감정이입이 이루어진다. 자극적 사건의 연속 안에서 정작 인간 내면은 거세하는 소위 ‘막장드라마’와의 차이점이 거기에 있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 인물을 몰아넣고 심리 실험을 하는 듯한 노지마 신지의 이야기는 보는 이들이 함께 그들의 고민에 동참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발생한다. 가령 1994년의 문제작 <인간실격>에서는 집단 따돌림과 십대 소년의 죽음을 통해 공감 능력을 상실한 시대의 비인간성을 물었다. <플라토닉>의 경우에는 ‘산다는 것’의 문제다. 사라는 딸이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포기한 상태다. 반면 죽어가는 청년은 타인을 구하는 것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3회에서 “사는 것과 그냥 살고 있는 건 다르다”며 사라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청년의 대사는 이 극의 주제다. 이 지점에서 새삼 작품 제목도 가슴에 와 닿는다. 또다른 주제의식 중 하나로 사랑의 본질을 탐구해왔던 노지마 신지가 이번에는 존재론적 질문의 답으로서 ‘진정한 사랑을 하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김선영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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