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어린 시절 내 기억이 시작되는 것은 1964년 도쿄올림픽 무렵부터다. 50년 이상 일본에서 살아왔지만 지금과 같은 역겨운 시대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7월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의 장애인 시설에서 ‘장애인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전직 직원이 태연하게 대량 살인을 저질렀다. 또 요코하마시의 한 병원에선 링거 주사에 계면활성제를 주입해 이를 맞은 환자들이 숨졌다. 이것도 입원 중인 고령자를 노린 병원 내부 관계자에 의한 살인이라 생각된다. 인간의 생명과 개인의 존엄을 무시하는 풍조가 지금과 같은 역겨운 사회 분위기의 근원에 있다. 예전에도 차별이나 집단 따돌림(이지메)이 있긴 했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선 텔레비전 등 공공 공간에서, 그리고 공직에 있는 이들이 태연히 다른 사람을 모독하고 경시하는 발언을 한다. 정권 옹호 발언을 거듭해온 텔레비전 사회자가 신장병으로 인공투석을 받고 있는 환자에게 ‘병은 자신의 책임으로 걸린 것이기 때문에 비용은 공적보험이 아니라 자비로 부담해야 하고, 부담할 수 없는 환자는 죽여도 좋다’는 발언을 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는 당연히 출연 중이던 방송에서 하차했지만, 자신의 발언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오키나와현 히가시촌에선 최근 미군의 시설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항의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선 경비 담당 경찰관이 지역민들에게 ‘토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권력자에게 빌붙어 있는 이들이나 권력의 말단에 있는 공무원이 솔선해 차별과 이지메를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차별도 이어진다. 오사카의 한 스시집에선 한국인 손님에게 와사비를 대량으로 넣는 등의 괴롭힘 행동이 있었다. 한국인 여행자에 대한 폭력 행동도 발생했다. 자신이 몸 건강한 일본인이라는 것밖엔 내세울 게 없는,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또다른 약자들이 고령자·환자·외국인을 차별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울분을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한심한 사회 현상에 대해 정치나 언론의 지도자들이 별다른 위기감을 갖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이번 국회에선 개헌 관련 논의가 시작돼 자민당 헌법 초안에 담겨 있는 “가족은 상부상조해야 한다”는 조문에 대한 논의도 이뤄지는 중이다. 자민당의 정치가는 헌법이 국민에게 ‘가족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명령하면 모두가 이를 따라 사회 안녕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정신론을 통해 일본 사회의 쇠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빈곤, 격차의 확대, 장시간 노동에 의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의 파괴 등이 현재 일본 사회가 후퇴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헌법에 관한 논의를 한다면 ‘가족은 사이좋게’보다 좀더 근본적인 것들, 즉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 고귀한 것이며, 개인의 존엄을 모독해선 안 된다는 것과 같은 문명사회의 규칙을 여러 기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강조하고 호소하는 게 정치가들의 사명일 것이다. 맹자가 말한 대로 ‘항산(恒産) 없는 곳에 항심(恒心)도 없다’. 사람은 기본적인 생활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타자에 대한 배려나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장애인 시설이나 병원에서 충격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이유 가운데는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에 대한 대우가 열악하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 어떤 종류의 자긍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격차 빈곤 사회 속에서 자신이 몸 건강한 일본인이라는 것 외에 자긍심을 가질 게 없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배출구를 찾는 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닌 사회의 병리다. 정치의 역할은 헌법을 개정해 국민에게 도덕을 설교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하루에 8시간 일하면 최저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고용과 사회의 틀을 재건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임무이다. 유대인 대량학살을 용인한 1930년대 독일과 현재 일본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칼럼 |
[세계의 창] 오만과 편견 / 야마구치 지로 |
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어린 시절 내 기억이 시작되는 것은 1964년 도쿄올림픽 무렵부터다. 50년 이상 일본에서 살아왔지만 지금과 같은 역겨운 시대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7월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의 장애인 시설에서 ‘장애인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전직 직원이 태연하게 대량 살인을 저질렀다. 또 요코하마시의 한 병원에선 링거 주사에 계면활성제를 주입해 이를 맞은 환자들이 숨졌다. 이것도 입원 중인 고령자를 노린 병원 내부 관계자에 의한 살인이라 생각된다. 인간의 생명과 개인의 존엄을 무시하는 풍조가 지금과 같은 역겨운 사회 분위기의 근원에 있다. 예전에도 차별이나 집단 따돌림(이지메)이 있긴 했다. 그러나 현재 일본에선 텔레비전 등 공공 공간에서, 그리고 공직에 있는 이들이 태연히 다른 사람을 모독하고 경시하는 발언을 한다. 정권 옹호 발언을 거듭해온 텔레비전 사회자가 신장병으로 인공투석을 받고 있는 환자에게 ‘병은 자신의 책임으로 걸린 것이기 때문에 비용은 공적보험이 아니라 자비로 부담해야 하고, 부담할 수 없는 환자는 죽여도 좋다’는 발언을 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는 당연히 출연 중이던 방송에서 하차했지만, 자신의 발언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오키나와현 히가시촌에선 최근 미군의 시설 건설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항의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선 경비 담당 경찰관이 지역민들에게 ‘토인’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권력자에게 빌붙어 있는 이들이나 권력의 말단에 있는 공무원이 솔선해 차별과 이지메를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차별도 이어진다. 오사카의 한 스시집에선 한국인 손님에게 와사비를 대량으로 넣는 등의 괴롭힘 행동이 있었다. 한국인 여행자에 대한 폭력 행동도 발생했다. 자신이 몸 건강한 일본인이라는 것밖엔 내세울 게 없는,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또다른 약자들이 고령자·환자·외국인을 차별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울분을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한심한 사회 현상에 대해 정치나 언론의 지도자들이 별다른 위기감을 갖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이번 국회에선 개헌 관련 논의가 시작돼 자민당 헌법 초안에 담겨 있는 “가족은 상부상조해야 한다”는 조문에 대한 논의도 이뤄지는 중이다. 자민당의 정치가는 헌법이 국민에게 ‘가족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명령하면 모두가 이를 따라 사회 안녕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정신론을 통해 일본 사회의 쇠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빈곤, 격차의 확대, 장시간 노동에 의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의 파괴 등이 현재 일본 사회가 후퇴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헌법에 관한 논의를 한다면 ‘가족은 사이좋게’보다 좀더 근본적인 것들, 즉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 고귀한 것이며, 개인의 존엄을 모독해선 안 된다는 것과 같은 문명사회의 규칙을 여러 기회를 통해 국민들에게 강조하고 호소하는 게 정치가들의 사명일 것이다. 맹자가 말한 대로 ‘항산(恒産) 없는 곳에 항심(恒心)도 없다’. 사람은 기본적인 생활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타자에 대한 배려나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장애인 시설이나 병원에서 충격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이유 가운데는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에 대한 대우가 열악하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 어떤 종류의 자긍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격차 빈곤 사회 속에서 자신이 몸 건강한 일본인이라는 것 외에 자긍심을 가질 게 없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배출구를 찾는 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닌 사회의 병리다. 정치의 역할은 헌법을 개정해 국민에게 도덕을 설교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하루에 8시간 일하면 최저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고용과 사회의 틀을 재건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임무이다. 유대인 대량학살을 용인한 1930년대 독일과 현재 일본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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