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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8.20 17:40 수정 : 2007.08.20 17:40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야!한국사회

학창 시절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것은 일종의 금기이자 사치였다. 일단 혹독한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절박했고, 학교는 명문대에만 합격하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이뤄질 것이라는 장밋빛 환상을 유포했다. 그 와중에 입시를 앞둔 친구들 사이엔 이런 자조 섞인 농담이 오고갔다. 세상에는 딱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하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 수 있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못 가는 인간’이라는 이야기였다. 내게 이 말을 전해들은 강남 8학군 출신의 대학 동기 중 하나는 자기 학교에서는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이 ‘서울대를 갈 수 있는 인간’과 ‘서울대를 못 가는 인간’이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전국의 청소년들을 성적순으로 위계화하여 인간의 가치와 품격을 오롯이 ‘성적’만으로 재단하는 상황에서 학교는 사람들 사이에 미움과 질투, 두려움을 심어주는 괴기스런 장소가 될 수밖에 없다.

항상 친구에게 1등 자리를 내 주었던 만년 2등이 1등이 되고 싶어 우발적으로 1등 친구를 살해하게 되고, 그렇게 죽음을 당한 친구가 귀신이 되어 자신을 죽게 만든 친구를 찾아 이 교실, 저 교실 찾아다닌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기억하시는지.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 괴담은 성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교육사회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이 괴담은 다음 두 가지 모순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선, 세상은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나누는 불평등한 곳이며, 학력과 학벌은 천국으로 가는 열쇠라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든 남들보다 더 많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신분 사회의 멤버십 카드를 손에 넣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다른 한편 이 괴담은 1등 자리를 넘보는 열등한 존재들에게 오르지 못할 나무를 절대 넘보지도 말라는 경고 메시지를 담고 있다. 누구든 불평등한 신분 질서에 도전하는 자는 비참한 일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경고, 곧 열등한 자들이 우월한 자들이 누리는 특권과 이익을 나누려고 시도하다가는 이렇게 철저한 보복과 응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다.

사회 유명 인사들의 학력 위조 사건들과 이랜드 사태를 둘러싼 작금의 상황들은 이 괴담의 두 가지 메시지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학력이나 학벌과 그다지 상관 없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조차 학력을 위조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신분제 이데올로기가 전체 사회 시스템에 속속들이 파고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력과 업적보다는 학력과 학벌이 그 분야에서 더 인정받을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곳에서, 학력과 학벌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곳에서 신분 상승을 위한 학력 위조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에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부당한 신분 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 수년간 비정규직이라는 위치 때문에 남들과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을 감내해 온 노동자들이 점점 더 그보다 더 열악한 용역직으로 내몰리게 되는 상황, 그리고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는커녕 불안정한 고용형태를 이용해 부당한 착취를 일삼는 악덕 기업주 편을 들어 공권력을 투입하여 억울한 사람들을 오히려 범죄자로 만들고 있는 현정권의 무소신과 무책임의 태도, 이런 것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광범위한 불감증은 불평등한 사회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학력과 학벌 이데올로기의 또다른 모습은 아닐까.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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