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7.09 17:52
수정 : 2007.07.0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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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현 /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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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이랜드그룹의 비정규직 대량 해고, 그리고 박명수 전 우리은행 여자농구팀 감독의 성추행 사건. 겉으로 보기엔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이 두 사건은 모두 고용불안과 관련이 있는 인권침해 사건이다. ‘부당해고’와 ‘성희롱’은 어떠한 고용 구조와 환경에서 발생하느냐에 따라 해당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큰 차이가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차별적 조건에서 일해야 한다. 대개의 경우 이들에겐 노조라는 울타리가 없어서 부당한 일이 생겨도 호소할 곳이 없다. 기업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안’을 볼모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랜드그룹 문제와 함께 여자 선수 성추행 사건이 오버랩되는 이유는 스포츠계에 만연한 성범죄가 여자 선수들이 처한 차별적이고 적대적인 노동 조건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자 감독의 여자 선수 성추행이나 폭행이 스포츠계의 오랜 악습이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문제는 이런 악습이 그동안 전혀 표면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희준 동아대 교수가 조사한바, 그동안 스포츠계 여자 선수들은 인권 사각지대에 있었다. 여자 선수들은 합숙을 통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해 왔고, 팀을 선택할 때도 선수 본인의 의향은 무시되기가 일쑤였으며, 적절한 연봉 협상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 선수들에게는 자신의 운동 경력을 지도자 과정과 연계시킬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의 불안정한 노동 조건 때문에 자신들이 겪어온 어려움을 호소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희롱이 발생하면 피해자는 부당해고뿐만 아니라 소속 기관과 동료·상사 등으로부터 철저한 고립과 소외를 각오하지 않으면 쉽게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피해 선수의 동료 중 일부가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었느냐”, “너 때문에 우리 감독님이 감옥 가게 생겼다”며 피해 선수를 못마땅해한다는 말이 들린다. 여기서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진부한 수사는 여자 선수들이 처한 불안정하고 적대적인 고용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할 뿐이다. 직장내 성희롱 상담에서 피해자가 비정규직인 경우 동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증언을 회피하거나 심지어 피해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것은 조직 내 왕따를 견디고 자기 밥줄을 걸고서야 동료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의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직장내 성희롱의 법적 구제 절차가 마련된 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피해 사실을 밝힌 성희롱 피해자가 직장을 떠나게 되는 상황은 여전하다. 문제는 ‘비정규직’ 혹은 ‘여성’ 노동자들이 놓인 차별적이고 적대적인 노동 환경이 개선될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갈수록 더 악화될 것이 명약관화해 보인다는 점이다.
재판부는 “초범인데다 만취 상태로 우발적으로 범행한 점, 농구계 발전과 국위선양을 위해 노력한 점”을 참작해 박 감독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랜드그룹은 조직적인 대량 해고를 자행하고도 강경태도를 고집하고 있고, 우리은행은 성추행 사건을 두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공권력이 자정능력을 상실한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이 비판적 시민의식이다. 부당한 차별과 인권 침해를 서슴지 않는 기업, 기업 편을 들어 비정규직 차별을 강화하는 공권력, 가해자를 두둔하는 사법부, 이들의 행태들을 좌시하지 않는 시민의식이야말로 법보다 강력한 족쇄가 아닐까.
권수현 /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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