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6.13 17:58
수정 : 2007.08.2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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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훈/‘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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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국기에 대한 맹세’의 존속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맹세’가 일제하 황국신민 서사에서 유래했고, 현재 맹세문의 내용이 박정희 유신독재의 산물로서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은 내게는 부차적으로 보인다.
문제의 본질은 국가가 ‘충성’을 강제하는 데 있다. 국가가 ‘충성’의 대상인가? 이 문제가 개인의 자율적 판단 영역에 존재하는 한 정답은 없다. 그러나 ‘국가가 충성을 강제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국가의 충성 강제는 국가-국민의 관계를 권리·의무의 상호관계로부터 일방적으로 ‘의무를 다하는’ 위계적 관계로 바뀌고, 군대와 같은 특수한 규율관계를 국민 전체로 부당하게 일반화한다. 따라서 헌법의 근본정신에 반한다. 또한 이러한 관점은 국가 구성원의 지위가 변화돼 온 역사의 방향과도 배치된다. 충성을 강요당하는 봉건적 ‘신민’으로부터 권리·의무 관계인 근대적 ‘시민’으로 주체의 지위를 고양시켜 온 역사를 되돌리는 시도는 부당하다.
행정자치부가 제시한 세 가지 맹세문 개정안에는 국가에 의무를 다하는 국민만이 존재하며,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권리의 주장과 충성 맹세라는 형식이 본질적으로 조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이 종종 주권자인 시민들을 향한 ‘폭력’으로 바뀌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국가를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민정신이 절실하다.
맹세의 존속을 주장하는 쪽은 요즘 학생들의 ‘개인주의’를 걱정한다. 그러나 개인주의를 ‘집단주의’ ‘국가주의’로 처방하는 것은 공동체의 건강에 치명적인 독이다. 집단주의는 확대된 개인주의에 불과하다. 개인이 사회적 관계의 존재이며, 국가와 민족이 그 ‘관계의 형식’ 중 하나임을 평화의 관점에 기초한 역사교육을 통해 고취하고, ‘관계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이다.
오후 5시 정각, 부동자세를 강요하는 맹세문 방송으로 말미암아 한창 축구를 하던 무리들 가운데서 득점의 유효성을 다투던 장면은 굴절된 현대사가 강요한, 그야말로 우스개였다. 그리고 이제, 70%가 넘는 여론이 바로 그 맹세의 존속에 찬성한다는 통계는 ‘국민’이라는 자기규정에 갇힌 우리의 인식과 국가주의 교육의 사회적 학습효과를 드러내는 슬픈 자화상이다.
역사의 변화와 발전은 충성과 복종의 정신을 내면화함으로써가 아니라, 자명한 것으로 인정되는 ‘전제’와 ‘진리’들을 의문에 부치는 용기와 자유로운 비판정신으로 이루어져 왔다. 1990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성조기를 훼손했다고 처벌한다면 성조기가 상징하는 소중한 자유가 훼손될 것이다”라고 판결한 바 있다. 국가가 충성 맹세를 강요하고, 그러한 일방적인 규율을 내면화하는 사회적 정신에는 자유는 없고 자유의 그림자가 존재할 뿐이다.
조직폭력 집단도 조직원 가입 절차에 충성 맹세를 강요한다.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는 조직을 유지하려면 비판을 불허하는 맹세의 형식이 필수적일 터이다.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구성원의 자유·평등을 보장하고 배분적 정의를 달성하려는 국가적 노력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 맹세의 강요를 통하여 손쉽게 확보하려는 국가 철학은 빈곤하다. 국가는 맹세를 강요해 절대자의 자리를 넘보지만, 내게는 그러한 시도가 ‘조폭 논리’의 국가적 버전으로 읽힌다. ‘국민’을 ‘넘버 스리’로 만드는 충성 맹세 강요를 폐지하는 것만이 주권과 권력의 정당성이 국민한테 있음을 선언한 헌법의 정신에 맞아든다.
정정훈/‘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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