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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04 17:29 수정 : 2007.06.04 17:29

반이정/미술평론가

야!한국사회

얼마 전 특정 온라인 동호회에서 벌어진 소동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당시 사건을 요령껏 재구성한들 사건과 연관 없는 불특정 독자에게 상황이 온전히 체감될 턱은 없지만, 그 사소한 소동이 남긴 과제는 공동체에 대한 실로 중대한 질문을 내게 남겼기에, 개요를 정리해 본다.

회원 2만5천을 육박하는 해당 동호회에서 별 대단치 않은 의사 표현이 문제가 되어 회원 한분이 강제 퇴출당했다. 그럴 수도 있는 일 같지만, 이미 그 전후로 해당 카페 운영자의 기이한 취향에 저촉된 게시물들이 양해 없이 숱하게 삭제되거나, 게시자들이 조용히 퇴출되는 비상식적 파행이 누적된 터라, 회원들의 인내력은 바닥이 났고, 운영자 개인의 전횡을 묵과해선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필자 또한 카페 정상화를 촉구하는, 어울리지 않게 긴 글을 세 차례 남긴 이유로 곧 강제 퇴출당했다. 옆에서만 지켜보던 강퇴의 직접 경험은 대단히 차원이 다른 것이다. 쓰기 및 읽기 기능이 전면 박탈되어 공동체와 완벽하게 격리되고, 억울한 처지를 토로할 입은 밀봉된 채 외딴 방에 내던진 기분이랄까. 그것은 불쾌를 넘어 무력, 상실,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환멸에 이른다. 나 이후 비슷한 이유로 대규모 퇴출이 휩쓸었고, 그 자리에 희비극적 회칙이 새로 올려졌는데, 요약하면 회원의 동의 없이 운영 전권을 운영자 한명에게 집중하며 이에 반할 때 퇴출된다는 내용이었다. 일부 회원들은 카페 운영이란 개설자 마음대로이니 따르기 싫으면 나가라는, 차마 읽어주기조차 딱한 지지의 글을 올려, 나와 회원들을 맥 빠지게 했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초현실적 진술은 17세기 프랑스 절대왕정의 전횡을 기억할 때 인용되는 과거사적 인용구다. 그러나 멸종된 것으로 간주된 그 집정원리가 21세기에 공표되고 또한 생존하는 것은 다수의 침묵과 눈먼 소수의 몰상식의 결합이 있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온라인 공동체의 생리는 그것의 출범과 함께 개설자의 손을 떠나는 것이고, 그런 데서 미덕이 찾아지는 법이다. 풍성한 카페 자료실과 이를 구심점으로 엮인 거미줄 같은 인간관계는 더는 운영자의 공덕도 그의 사유물도 아니다. 온라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나이 지위 고하를 떠나 상호 ‘님’으로 호칭하는 까닭도 수평적 지위가 전제될 때, 공동체의 건강이 보장된다는 묵인의 결과일 것이다.

필자는 이번 사태의 중재를 카페가 개설된 네이버에 요청했으나, 회사는 카페 운영 전권을 카페 운영자, 스태프, 회원에게 부여하고 일체 개입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얼핏 민주적 조처 같으나, 전권이 카페 운영자에게 집중된 현 온라인 카페의 속성을 감안할 때, 복잡한 사태에 회사는 연루되지 않겠다는 의지다. 초고속 인터넷망 보급으로 공동체의 여론 수렴을 네티즌의 견해 인용으로 갈음하는 언론계 사정에서 온라인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악플러에 대한 사회적 주의가 환기된 것도 불과 얼마 전이다. 그러나 동호 차원에서 결성된 온라인 공동체 내부의 모래성 같은 윤리의식과 소수자 보호에 대한 불감증은 예상도, 대처도 못하는 실정이다.

무소불위의 언론과 기업체를 ‘선출되지 않는 권력’이라 표현한다.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되지만, 일부 온라인 공동체의 전횡은 선출되지도 견제받지도 않는 권력의 비가시적 현현이다. 문제는 온라인 공동체의 부조리에 둔감해진 구성원들이 오프라인에서 동일한 자세를 연장, 재생산하는 장면이다. 이는 상상만으로도 잔혹하다. 현실 공간에서 목격되는 정치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개인주의가 비가시적 온라인 공동체에서 학습된 처세술의 결과 또는 원인일 거라는 추정은 결코 과한 우려가 아니라고 나는 본다.

반이정/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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