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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23 17:35 수정 : 2007.08.24 18:03

정정훈/‘공감’ 변호사

야!한국사회

법과 제도의 핵심은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는 법과 제도는 관계의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내기보다는 부당한 ‘경계’를 생산하고 폭력적으로 고착시킨다. 법이 새로운 ‘경계’를 인위적으로 설정하거나 부당한 관습적 경계의 존재를 법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주로 경계 내부의 안전을 위해 경계 외부를 배제하기 위함이며, 따라서 그 경계의 자리에는 법적·제도적 우상이 세워지곤 한다. 우상이 세워진 경계의 자리에는 상호 간의 능동적 작용을 통하여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는 관계의 지평은 사라진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경계를 긋는 국가보안법과 국기에 대한 맹세 규정, 인권과 시민권의 적용을 국민의 범주로 제약하여 외국인을 배제하는 헌법적 규정, 이주노동자의 저임금을 강제하기 위해 사업장 이동을 제한하는 고용허가제법, 개인의 성별 정체성을 1과 2의 코드로 포획하여 사회적 차별을 재생산하는 주민등록번호,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통해 사회적 격리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등. 소통의 가능성인 ‘관계’를 지우고 부당하게 ‘경계’를 설정하는 이 법적 우상들이 그토록 요지부동으로 단단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법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폐쇄적인 동어반복에 기초해 있고, 법률 또는 제도의 형식으로 그 폭력적 본질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촘촘하게 짜인 ‘경계’ 내부에서 ‘관계’를 희생한 대가로 ‘우리’는 안전하지만, 그 안전은 동굴 속의 안전에 불과하며, 개별적 인간의 존엄을 희생하여 집단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전체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동굴 속에 드리워져 있다. 구체적 관계 아래서 절대적 타자란 존재할 수 없기에 배제의 결과와 전체주의적 일상의 문제는 언제나 ‘우리’의 문제다. 그럼에도 ‘강 건너 불구경’이 계속되는 것은 관계를 단절시키는 경계로 말미암아 경계 너머와의 소통은 물론이고 경계 내부에서의 소통마저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법적 문제가 법 규정의 자기완결적 체계 안에서 판단되어야만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구체적 인간의 존엄성과 관계적 정의를 확보하는 가능성이 부정된 법적 안정성은 그 자체가 부당하다는 인식을 우리가 새롭게 함께할 수 있다면 우리는 법적 우상들의 동굴에서 빠져 나와 ‘관계’를 회복하는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현존하는 최고 권력에의 복종을 실천이성의 원리로 삼는 대철학자 칸트의 법철학적 한계를 우리가 훌쩍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의 저작 <우상의 황혼>의 부제는 ‘망치 들고 철학하기’이다. 법과 제도의 영역에서 우상을 대면할 때 준법의 논리로 구체적 고통을 외면하거나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논리로 ‘주먹’을 앞세우기 이전에, 우상을 향해 ‘망치’를 들고 법적 정당성을 의문에 부치는 단호한 인식의 점검이 필요하다. 법과 제도의 영역에 존재하는 우상들은 그 외견상의 견고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합리성의 기초는 매우 취약하다. 제한된 대의제적 한계를 넘어서 일상의 삶에서 입법자가 되어 현실을 대면할 수 있다면 법적 우상들은 스스로 그 기초를 잃고 무너질 것이다. 부당한 경계를 해체하여 관계를 구성하고, 경계 내부의 보편성 확립을 통하여 경계 너머의 가능성을 여는 것은 관계의 길인 우리들의 ‘공감’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것이 ‘미녀들의 수다’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고통의 절규에 우리들이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정정훈/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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